지구는 맑음 1화
'이런 애가 지구를 지켜도 되는 걸까?'
내가 그를 보면 드는 생각은 이러했다. 물론 그의 보랏빛의 깊은 눈동자와 흩날리는 짧은 검은 머리와 날렵한 턱선과 투명한 피부, 그리고 적당히 날렵하게 빠진 체형은 기품있어 보였다. 외모로는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그러니 외형은 일단 지구를 지킨다는 명분에 적합. 내 불만은 이런 이 녀석의 외모에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것. 나는 무심코 안이 좁디좁은 테이크아웃 보급형 카페 앞에서 카페라떼를 쪽쪽 빨며 줄을 선 사람들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다들 속고 있어."
"뭐가?"
무심하다 못해 귀찮다는 말투가 바로 내리꽂혔다. 귀도 밝지. 나 같으면 싸인을 해주느라 정신이 없어서 듣지도 못했을 텐데, 멀티플레이어다. 그 와중에 나까지 신경을 써주고.
"너는…… 아냐."
그렇게 스타가 될만큼 성격이 괜찮지 않은데! 나는 빼액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싸인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눈치를 본다. 개중에 여자들은 나에게 질투와 시기의 눈초리로 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악을 부릴 용기는 없었다. 나는 다소곳하게 카페라떼를 빨며 있었다. 내가 한 잔을 다 마실 동안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싸인을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스텔라맨 화이팅!"
"스텔라맨 사랑해요!"
그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자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거리를 걸어 다녀도 괜찮은 거야?"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 만나자고 해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인만 해주고 있으니 뭔가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신경 쓸 거 없어."
"너는 무신경해서 신경이 안 쓰이더라도, 나는 신경이 쓰인다고."
"너는…. 왜 히어로가 되지 않은 거야?"
"또 그 소리야? 넌 만날 때마다 그 소리를 하더라."
"잠재력 수치가 높게 나왔었잖아. 나 같으면, 히어로를 하겠어. 위험해도 보람있는 일이야. 돈도 많이 벌고."
그러면 그렇지. 저놈은 그다지 순수한 의도로 히어로를 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그를 째려봤다.
"나도 돈 벌고 싶지. 하지만 다르게 할 거야."
"어떻게 다르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빤히 스텔라맨을 쳐다보았다. 스텔라맨은 깊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는 아버지를 믿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나도 하는 것 있어. 나도 고3이라고. 공부부터 할 거야."
나는 염증이 나서 외쳤다. 하지만 알고 있다.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다는 걸. 다만 히어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히어로였고 아버지는 꽤 유명한 히어로이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 얼굴도 알려져 있었다.
저 유명한 스텔라맨에게 내가 붙어있는 것이 허용되는 것도 아버지가 유명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살아있는 것도 조금 지루했다. 공부도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있다. 하지만 히어로는 하고 싶지 않다. 매일 내게 태클을 거는 저 스텔라맨 때문은 아니었다.
"히어로학과로 와. 반드시 히어로가 아니어도 돼. 특수히어로학과에는 아직 히어로가 되지 못한 지망생들도 많아."
"아, 됐어. 소꿉친구라고 내 진로까지 정하진 마."
"너희 부모님도 그걸 원하시잖아. 너도 재능이 있고. 아깝잖아."
"부모님 인생과 내 인생은 달라."
나는 카페라떼 커피 컵을 구겼다. 그리고 스텔라맨, 내 친구 선우를 보았다. 악당을 상대하는 데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불리는 스텔라맨. 하지만 지금은 한가한지 긴 속눈썹이 내려앉은 눈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커피 안 마실 거면 나나 줘."
나는 척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커피를 내밀었다.
며칠 뒤, 주말이었다. 원 샷, 원 킬. 나는 새로 나온 게임, ‘히어로가 되자!’를 하며 ‘그렇지!’라고 중얼거렸다. 손에서 전류를 쏘자 적군들은 파바바박 튕겨 나가 사라진다. 튜토리얼은 가볍게 깰 수 있다. 캡슐 안에 들어가면 실제상황처럼 생생하게 촉감이 전해져왔지만 나는 튜토리얼을 끝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튜토리얼만 반복하기를 30번 째쯤 된 것 같다. 나는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히어로가 되자!’ 캡슐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오면서 깜짝 놀랐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캡슐게임이 아니라, 이렇게 드러난 곳에서 게임을 하다니. 녀석도 철면피라니까.
“선우야.”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빙그레 둘러싸기만 하고 있었는데, 과감히 다가가는 나를 보고는 외계인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응. 동전 좀 줄래?”
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넨다.
“…….”
나는 말 없이 오백원짜리 여섯 개를 선우가 게임을 하는 옆에다가 놓았다.
“오 땡큐. 너도 같이할래?”
“난 안 해.”
나는 새침하게 말한다.
선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게임에 열중해있다. 나는 가만히 있다 참지 못하고 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웬일이야? 사람들이 너만 보고 있잖아.”
그도 그럴 게 사람들이 모여 선우만 보고 있었다. 선우의 주변으로는 둥그런 홀이 생겨 있다. 사람들이 다가가지는 않고 주변에서 선우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눈빛이 부담스럽기만 한데 선우는 역시 철면피다. 둔감한 녀석.
“너희 집 뽀삐가 이리로 가자고 해서.”
“뽀삐?”
뽀삐라면 우리 집 식구였지만 우리 집 식구 이전에 히어로협회에서 아빠에게 붙여준 히어로몬스터였다.
외계 포털이 열리면서 유입된 몬스터 중에는 길들일 수 있는 유순한 몬스터와 길들일 수 없는 야생몬스터로 나뉘었는데, 야생몬스터는 대부분 도심을 파괴하고 있어 퇴치 대상 중 하나였다. 악당 블루헤드들이 조종해서 파괴만을 일삼는 것도 거의 야생몬스터여서 야생몬스터는 악당과 다름없이 취급되고는 했다. 반면 유순한 몬스터는 사람들과 생활하기도 했는데, 그중 똑똑하고 힘이 센 몬스터는 특별히 히어로몬스터로 지정되어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뽀삐는 그런 히어로 몬스터였다. 도톰한 몸집에 둥둥 떠다니며 후각이 발달했다. 아빠와 함께 은퇴했지만 가끔 선우, 스텔라맨을 돕기도 했다.
그런 뽀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걱정 마. 그냥 순찰이니까.”
내 눈빛을 읽은 것인지 선우는 무심히 툭 말했다.
“블루헤드가 석 달째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걱정스레 말을 건네자 선우는 여전히 게임을 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순찰을 하는 거지. 아 뽀삐가 왔다.”
소형화된 뽀삐가 흐늘흐늘 한 마리의 나비처럼 날아왔다. 선우가 웅얼거렸다.
“대피…….”
“뭐라고? 잘 안 들려.”
선우는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줘. 잘할 수 있지?”
“으윽, 정말 지겨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잘한다니까.”
선우는 씩 웃고 나서 마스크를 썼다. 재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보이지도 않는 초인, 스텔라맨. 그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잘 알아보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소형확성기를 켜고 사람들을 안내했다. 대피로를 안내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해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람들도 이제는 재난에 익숙해서 순식간에 질서정연하게 빠져나간다. 그 와중에 몇 명의 젊은 청년들이 오락실에 남아있었다.
“위험하니까 대피해주세요. 이 건물도 부서질 수 있습니다. 대피해주세요.”
나는 서둘러 그들을 재촉했다.
“블루헤드한테 우리 친구들이 당했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히어로학과가 있으니까, 그곳에 입학해서 후일을 기약해주세요. 물러나 주세요.”
시간이 점점 흐른다.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급해졌다. 부서지는 소리로 추측해봤을 때,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돌이라도 던지자!”
“물러나!”
밖으로 나가기 전에 벽이 기우뚱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히어로시계를 열었다.
빔!
작은 불빛이 선을 그리며 날아가 벽을 깨부쉈다.
“우아악!”
그들의 온몸에 돌멩이가 떨어진다. 나는 보호막을 구축하고 히어로협회에 연락을 했다. 한 친구는 팔뚝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망치라니까…….”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히어로들이 여러 명 날아온 것 같았다. 스텔라맨은 물론 투명화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화염이며, 얼음이 창문 밖으로 보인다.
무너진 건물에 갇혀있던 우리는 구출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조대가 오기 전에 불길한 발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저벅, 저벅. 이런 곳에 저런 발소리를 낼 인물이 몇이나 될까. 나는 잔뜩 긴장하여 옆을 보았다. 나와 같이 긴장한 청년들도 함께 옆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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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2020년도에 썼던 '히어로의 딸'을 아주 약간 손봐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조아라에도 전편 올라와 있는데요. 거기서는... 그 당시가 주식붐이 일었을 때여서 그런지, 너무 돈돈하고 돈을 밝혔던 것같아요. 시간이 지나니 반성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악역도 블랙카드로 이름을 정했었는데... 블랙카드가 있더라구요.
아차 싶어서 악역의 그룹 이름도 변경했습니다.
어쨌든 제목도 조금 바꿨구요. 1권짜리 장편이지만 처음에는 투고할까 싶어서 소개글도 적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히어로들이 대학생이 되어 수련기간을 거친다면?!
히어로답지 않은 히어로가 본의아니게 히어로수저를 물게 된다면?
일도 하고 연애도 하자!
그런데 연애하려는 소꿉친구는 너무 잘 나가는데.
양친 모두 히어로였는데 주인공인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하고
주변에는 다 히어로뿐인데
치이고, 치인다.
중요한 건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쫓아내는 것인데
그 외계인이 나에게 뽀뽀를 해달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주인공은 그 외계인을 쫓아낼 수 있을까?
데이터를 적게, 그리고 재미있게 봐주시면 저는 할 몫을 다한 것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