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을 넘지마 29화
무료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 매일 해오던 것이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A툰에도 일러스트 연재는 하고 있었지만, 이중으로 한다고 큰 문제는 없다. 빨리 결정해야 했다. 자신은 지금 뜨거운 감자여서, 식어버리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휴…….”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나? 전화했던 모양인데. 진형은 뒤늦게 후회를 했다.
하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닌걸.
이선이 왜 저러는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편, 이선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배신감이 들었다. 자신은 그래도 진형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해서 그렇게 체인점 제안도 받아들였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전화도 받지 않고, 그 새 마음이 변한 건가 싶기도 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는데,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선은 간신히 웃음을 그려냈다.
“어서 오세…….”
그러더니 굳고 말았다. 진형이 그새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진형.”
이선은 내심 사과를 기대했다.
“나 사업할 생각이다. 만화 사업.”
이선은 머리가 띵해졌다. 진형은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다.”
그러더니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선은 나가는 진형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러려고 들어왔단 말이야? 사업이라니?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이선은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다. 진형은 가게에 오지 않았다. 이럴 때면 항상 먼저 사과해오던 진형이라 이선은 그 공백이 낯설면서도, 뭔가 진형의 자존심을 어딘가 많이 자극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 역시 했다.
교육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있었는데, 이선은 가서 멍하니 한숨만 쉬고 있었다. 여러 체인점을 통솔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이선의 태도는 금방 눈에 띄었다.
그러나 진해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빴고 이선은 항상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일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런 이선의 태도를 회사에 보고하는 듯했다.
“이선씨 잠깐 나와 볼래요?”
“아, 네!”
밖에 나가며 이선은 틀림없이 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고 바짝 긴장했다. 집중은 되지 않는데 회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괴로웠다.
그러나 바깥에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전무님. 여기까지 웬일로…….”
회사에 나오면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해준이 서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이질감이 드는 아름다운 미소다.
“얘기 들었어요. 힘들어요?”
“아니에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흠, 잠깐 바람 좀 쐴래요? 좋은 커피숍을 알고 있어요.”
“지금 회의를 해야 하는데.”
“말해뒀어요. 나한테 말하면 내가 그 사람한테 보고하는 거로 합시다.”
너무 발언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아닌가? 이선은 좀 얼떨떨했지만, 진해준이 나서자 뒤쫓아 따라나섰다. 진해준은 잠시 잠시 뒤돌아보며 이선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다가 그녀가 다가오자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몸 상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건강한 건 몸 밖에 없는걸요.”
“아무렇지 않아 다행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데 끙끙 앓는 것은 아닌가하고.”
별 것 아닌 말이었는데 눈물이 북받치려고 했다.
“차를 타고 가야 해요. 괜찮겠죠?”
“네…….”
이번에는 눈에 띄지 않는 차였다. 해준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더니 안전벨트도 이선에게 매어주고 싱긋 웃었다.
“출발합니다.”
이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해준도 이선의 상태를 백미러로 살펴보더니 무표정인지 미소인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예요. 괴한의 일입니까. 진형 씨의 일입니까.”
“괴한은 없었어요. 그럴 리 없잖아요. 다들 과보호예요.”
“안전불감증은 좋지 않습니다. 진형씨의 일이로군요.”
“저도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아요.”
“갑자기요?”
“말할 사람이 없어서요.”
이선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해준은 아무 말 없이 운전했다. 이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이윽고 카페에 앉았다. 케냐와 브라질을 고르고 해준은 빙그레 웃었다.
“진형씨의 일이라면 들어주고 싶지 않지만 말해 봐요. 들어줄게요.”
“전무님한테 어떻게…….”
“섭섭한데요. 난 전무님이 아니라 해준씨이고 싶은데.”
이선은 피식 웃었다.
“봐요. 웃을 줄 알잖아요.”
“전무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좋지만, 당신을 웃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라구요. 마음 아파지니까.”
“…….”
이선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제게 잘해주시죠?”
“사람이 점점 위로 올라가다 보면 외로워지고, 주변에 순수한 사람들이 없어지죠. 친구라고 와서는 계획서를 빼돌리고 사기를 치려고 하기도 하고. 이선씨는 그런 악의가 없어요.”
해준은 싱긋 웃었다.
“아, 진형씨도 마찬가지죠. 좀 거칠긴 하지만. 대놓고 부딪히니까.”
이선은 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커피가 나왔다.
“전무님은 어쩌다 사업을 하게 되셨어요?”
“음?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 거죠. 선택권이 없었어요. 장남이었고…….”
“남자들은 왜 사업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져서요.”
해준은 빠르게 눈치를 챘다.
“진형씨가 사업을 하겠다고 하나요?”
“아.”
이선은 아차 싶었다. 말실수했다. 해준은 빙그레 웃었다. 요즘은 씁쓸한 웃음을 많이 짓는다.
“내가 너무 많이 끼어든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전무님은 그저 잘해주신 것뿐이잖아요.”
“음, 들이대기도 했잖아요.”
“그, 그렇지만.”
하지만 해준이 대놓고 들이댄 것은 처음뿐이었다. 지금은 그저 지켜주려고 하는 것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사업을 한다. 사업을 한다……. 흠, 도와줄 수는 없어요.”
“물론이죠. 걔도 헛바람이 들어서!”
“하지만 이선씨는 사업하는 남자가 싫다고 했었죠.”
“네. 싫어요.”
“그럼 이제 진형씨가 싫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