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을 넘지마 26화
천우가 멍하니 진형의 자리를 보고 있었다. 걸레질해야 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진형은 여전히 노트북 가방을 들고 왔지만, 노트북을 꺼내놓지는 않았다. 대신 책을 잔뜩 쌓아두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무엇인가’
부터 해서 요즘 인기 있는 장르 소설까지 있었다.
오전부터 와서 오후까지 책만 읽고 있었다. 이런 진형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분명 사장님이 진형아! 축하해! 라고 했었으니까 드디어 웹툰 연재가 된 것인가? 천우는 조심스레 진형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어, 이선이한테 들었어?”
“웹툰 연재 하시나 보죠?”
“아니. 일러스트야.”
“근데 왜…….”
책이랑 일러스트는 정반대가 아닌가? 천우는 진형의 책을 바라보았다.
“꿈은 이루어진다!”
갑작스러운 진형의 외침에 천우는 눈을 끔벅끔벅했다.
“난 이루고야 말 거다. 천우야.”
“멋있어요. 형님.”
그건 천우의 진심이었다. 항상 진형은 몸도 잘 쓰고 말도 잘했다. 게다가 운동을 꾸준히 해서 몸도 좋았고 항상 노력하는 근성도 부러웠다. 자신에게 있어 진형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 딸랑거리며 문이 열렸다. 미리가 팔락팔락 책가방을 메고 걸어오고 있다. 천우는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진형은 의아하게 천우를 보았다. 둘은 대체 무슨 관계지?
“오빠들이다!”
“미리구나.”
진형이 일단 반겨주었다. 천우는 바로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돌아나갔다. 그런 천우에게 미리가 팔짱을 꼈다. 천우는 더욱 굳었다.
“오랜만이네요. 진형오빠는.”
“난 매일 왔어.”
“저번에 오니까 없던걸!”
“너랑 마주치지 않았던 거지. 자주 오는구나.”
“천우 오빠 보려고요.”
천우는 여전히 석고상처럼 굳어있다. 진형이 거들어주었다.
“천우 놔줘. 지금 혼자서 일하고 있거든. 빨리 일해야 해.”
“이선 언니는 어디 갔어요?”
천우에게서 팔짱을 풀고 미리가 진형의 앞에 앉았다. 천우가 휘청거리며 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진형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미리가 진형을 빤히 보고 있다. 진형은 모처럼 다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천우 말로는 본부에 갔다고 하던데. 여기에 분점도 생기고 체인점도 생긴대.”
“와 대단하다!”
“그래. 대단하지.”
“그럼 언니가 오빠 먹여 살리는 거예요?”
진형은 턱 말문이 막힌다.
“음, 오빠도 열심히 하고 있단다.”
“하지만 언니는 이제 진짜 대박 사장님인 거잖아요?”
진형은 미리를 빤히 보았다. 미리도 초롱초롱하게 진형을 보고 있다. 이럴 땐 공격이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다. 미리야. 너도 당해봐라.
“너 천우랑 사귀어?”
“그럼 좋겠지마안.”
별로 타격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화제는 돌려졌다.
“천우 오빠 좋아하는 거 뭐예요?”
“정원 가꾸기?”
“그런 거 말구. 좀 유용한 거.”
“넌 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었냐?”
진형이 어딘가 조금 띠겁게 말을 건넸다.
“에이, 오빠 섭섭했구나.”
“섭섭하지는 않아.”
진형은 단호하게 말을 건네주었다. 더 단호한 말이 없을까, 진형은 궁리했다. 그동안 미리가 우후후 웃었다.
“진형오빠는 이선언니가 있으니깐. 포기예요. 포기.”
“그러냐?”
“저거 봐. 천우 오빠 실수했어. 너무 귀여워. 어떡해~.”
진형은 옆을 돌아보았다. 어떤 손님이 와서 샷을 두 번 넣어 너무 진하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천우는 얼굴이 붉어진 채, 죄송합니다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이 삿대질하며 욕설을 시작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나 카페인 먹으면 안 된다고! 제대로 못 해! 이러면서 돈 받아먹어? 환불하고 새로 만들라고!”
“죄송합니다. 새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환불은 곤란합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날로 처먹네! 야! 이거 해서 70%는 남겨 먹지?”
미리가 벌떡 일어섰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
진형이 일어서서 미리를 막았다.
“왜 이래요! 내가 천우오빠 지켜줄 거야.”
“네가 그러면 일 더 커진다.”
“그럼 오빠가 나서면?”
“에휴.”
진형은 미리의 어깨를 잡아 앉히고 손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는 십 원짜리가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손님.”
그 사람은 진형을 보자, 덩치를 보고 한 두 발짝 물러섰다. 일단 진형의 큰 몸은 위압감이 들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나가주시겠습니까.”
“이 새끼야! 사, 사과면 다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겁을 먹은 듯했다. 진형은 다시 그 사람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 사람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내가 다시는 이 집에 오나 봐라! 엉! 에이, 재수 없어!”
손님은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천우는 진형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 고마워요.”
“힘내라.”
진형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이곳으로 온다. 미리가 입을 가리고 꺄악거렸다.
“멋있어. 역시 내 옛사랑.”
“누가 너 옛사랑이니…….”
“아 어쩌지. 다른 매력이란 말이죠. 나 다시 진형오빠 좋아할까 봐. 아냐. 그래도 의리가 있지. 천우 오빠 파이팅! 우리 남편 지켜줘서 고마워요.”
“누가 너 남편이야. 누가.”
미리는 꺄아 소리를 내며 진형의 장르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진형은 마주 앉은 미리를 쫓아낼 생각을 포기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었다. 너무 읽다 보니 이것도 집중이 잘되지 않는다. 이선을 기다렸는데,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이선은 오지 않았다.
‘진해준이랑 있는 거 아닌가?’
진형은 조금 우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톡이 왔다. 얼른 들여다보자, 거의 1년 만에 연락을 한 것 같은 동창의 카톡이 와있다.
-진형아 오랜만이다. 네 만화 봤다. 오늘 술 한잔할래?
이 녀석이 웬일로…….
소식은 종종 듣고 있는 친구다. 그는 삼등신으로 귀여웠던 그림체로 한때 엄청나게 유명했지만, 지금은 다시 무명으로 돌아왔다. 간간이 커뮤니티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단체로 모일 때만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술 한 잔을 하자고?
-웬일이냐
-시간 되냐?
-된다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마시자는 느낌이 되어 진형은 답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