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을 넘지마 15화
“괜찮으세요?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기침을 해서……. 콜록콜록!”
천우가 다시금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천우씨. 진정해.”
이선은 다시 천우의 등을 두드렸다.
“천우씨 먼저 퇴근할래?”
“네. 사장님. 저, 죄송합니다.”
간신히 기침이 멎은 천우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고개를 꾸뻑 숙였다. 천우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을 때, 이선은 가게에 클로즈를 걸어놓고 바에 앉았다.
진형이 저렇게 이성을 잃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름대로 웹툰작가이니까 감성적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진형은 항상 기계묘사와 정밀한 소묘를 잘했고, 성격도 남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사실 진형의 고백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잊고 있었지만.
진형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다. 중학교 친구인 혜은은 만화책을 읽는 것에 푹 빠져있었고, 이선도 그 덕택에 순정만화를 꽤 읽을 수 있었다. 혜은은 만화 동아리를 함께 들자고 재촉했다. 이선은 동아리까지 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처음 중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혜은과 함께 동아리 시험을 보았다.
거기에 진형이 있었다.
진형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체격이 큰 편이어서 시선을 끌기는 했다.
시험을 본 다음 날, 방과 후에 동아리 방 앞에서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이는데, 진형이 복도에서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내 이름은 이진형이야. 너는?”
“난 정이선.”
“이선이라고 불러도 돼?”
“응 마음대로 불러!”
진형은 앳된 얼굴로 베실베실 웃었다.
그 이후 진형은 자주 이선에게 말을 붙였다. 이선도 진형과 얘기하며 만화의 과정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또 진형의 꿈이 만화작가인 것도 알게 되었다.
혜은은 가끔 이선에게 진형에 대한 것을 질문했다. 그것을 보고 진형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걔는 너한테만 그렇게 말이 많더라.”
“에이, 내가 만만하니까 그렇지.”
“저번에 책도 막 챙겨줬잖아. 너 좋아하는 거 아냐?”
“아니야.”
가끔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진형은 좋은 친구였다. 미묘하게 멀찍이서, 때로는 다정다감하게 챙겨주었다.
만화부에는 열정적인 아이들이 많았다. 옷을 직접 만들어 코스프레를 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신간을 전부 읽는 친구도 있었다. 이선은 유명한 만화는 읽었고 만화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정열을 따라가는 것은 조금 힘에 부쳤다.
진형이 새로 나온 만화를 빌려주겠다고 했을 때, 이선은 동아리 활동을 좀 자제하고 싶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혜은이 따라 들어왔는데, 좋아하는 친구들을 못 따라갈 것 같아.”
“천천히 해도 되는데……. 꾸준히는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쉴게.”
진형은 강요는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눈을 내리깔고 이선을 보았다.
“그럼, 그만둬도 만나줄 수 있어?”
“당연하지!”
“계속 봤으면 좋겠어.”
“응.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나한테 잘해줘?”
“솔직하게 말해도 돼? 충격받을 수도 있는데.”
“뭐야. 뭐야. 흑막이 있었구나?”
이선은 그때 조금 떨었다. 정말 충격적인 말을 들을까 봐.
“사랑한다.”
“뭐?”
하필 바람 소리가 크게 휘잉 날렸다. 하지만 이선은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진형은 바람결에 눈이 홉뜨며 못 들었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못 들었지?”
“……못 들었어.”
이선은 무심코 거짓말을 해버렸다.
“마왕이 시켰어.”
“뭐?”
“똑똑히 들었지?”
“마왕…….”
“그렇지. 귀는 살아있네. 계속 보자.”
이선이 황당한 채로 서 있자 진형은 걸어가 버렸다. 당시 진형은 마왕스토리에 빠져있었다.
그 이후로 이선과 진형은 계속 친구로 지내오고 있었다. 이선은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을 자신만이 아는 비밀로 간직해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진형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때 바람결에 못 들은 척한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고백이라 하기엔 부족할 수 있지만, 가끔 그랬었지. 하고 기억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지났고 우리도 많이 변했기 때문에 그 말도 다 변색하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진형은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진형.’
이선은 다시 한번 중얼거려 보았다.
이선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혜은에게 연락해볼까, 싶다가도 이런 일에 쉽게 연락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다들 거리가 생겼다. 혜은은 가끔 진형의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다. 제대로 된 동아리 활동은 그 둘이 더 오래 했는데도.
이선은 혜은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진형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진형은 플랫폼에도 웹툰을 올렸지만, 블로그에도 올려놓고 있었다.
이선은 입이 쩍 벌어졌다.
‘만 명?’
블로그 방문자 수가 만 명을 훨씬 웃돌았다. ‘좋아요’도 몇백 개씩 찍혀있다. 퍼가는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댓글에서도 설왕설래가 벌어졌다. 정의로운 작가님이라며 응원해줘야 한다는 의견과 실력으로 유명해져야지 편법으로 뜨려고 발악한다. 라는 의견. 아무래도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기는 했다.
이선은 자신도 ‘좋아요’를 한 번 누르고 타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편법이라니요. 실력 있는 작가님입니다.’라고 썼다가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 논쟁이 더 일어날 것 같다 싶어 지웠다. 다시 백지가 된 창에 ‘작가님 실력 있어요.’라고 쳤다가 다시 지웠다.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결국, 이선은 짧게 한 문장을 쳐서 넣었다.
-응원합니다^^
휴대폰을 닫고 나서 이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작품을 보고 있다. 진형의 기분은 어떨까? 이선은 평소라면 바로 진형에게 전화를 걸어 떠들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이렇게 중요한 날, 연락도 할 수 없다니.
‘어 왜 이러지?’
이선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그게 시작이었다. 점점 더 많은 눈물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 이선은 서둘러 닦아냈다.
“왜 이래. 나.”
일어서서 휴지를 뽑아 가지고 오는데 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그냥 그렇게 울었다.
손님들이 몇 사람 오다가 클로즈를 보고 돌아섰다. 그들은 이선이 우는 모습까지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짙은 밤이 내려오고 있었고 카페 안은 켜둔 불 덕택에 점점 밝아졌다.
“카페에서 주무셨어요? 불도 켜두시고.”
다음 날 아침 천우가 가게의 문을 열고서는 깜짝 놀랐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으로 이선은 천우를 보았다.
“으응.”
“제 잠바라도 입으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위험한데.”
천우는 생전 처음 보는 이선의 모습에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바를 건네고서 우유를 데웠다.
“앗. 뜨뜨!”
“괜찮아! 천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