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주 2023. 10. 24.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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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유리잔에 짙게 물든 그늘을 바라보며 해준은 취기 속에 멍하니 있었다. 이렇게 사소하게 시간을 죽이고 사소하게 자신을 망치는 일들이 즐겁게 느껴지는 죽음에의 욕망.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해준은 쓰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겉으로도 사춘기에 머물러있는 듯 보이는 그 녀석이 더 진솔한 걸 수도 있겠다.

 

혼자 앉은 바에서 그는 미지근해진 양주에 얼음을 넣었다. 동생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는 또 한 번 쓰게 웃었다.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한적한 바의 귀퉁이에서 크게 울렸다. 그 발소리를 듣고 해준은 동생이 온 걸 짐작했다. 그의 발소리는 공격적이고 무게감이 있었다. 그림자가 옆을 드리우더니 털썩,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다.

 

“술도 못하는 형이 웬일이야?”

 

불긋불긋한 화려한 자켓에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 수트차림에 깔끔한 해준과는 이질감이 드는 스타일이었다.

 

“네 힘을 좀 빌리고 싶어서.”

 

“형이? 영광이야.”

 

“건달들 사정은 네가 잘 알겠지. 한 사람을 돕고 싶은데.”

 

“이거, 웬일이야? 내 힘을 빌릴 정도야? 어떤 사람이길래?”

 

“그냥 평범해. 돈달라고 독촉하는 거 좀 말려줘. 빚진 금액을 안 받고 피해서 이자불리지 말고 다 갚을 수 있게도 도와주고.”

 

“여자?”

 

“여자긴 한데.”

 

“지금껏 만난 여자야 많았지만 이런 적 없었잖아? 단단히 빠진 거야?”

 

“더 묻지 말아.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니까.”

 

“궁금한데.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는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타입이기는 해. 하지만 돕는 건 그냥 마음이 내켜서 돕는 거야. 뭔가 동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거든.”

 

“빚 갚는 거에 동참하게 되는 힘? 그런 건 혼자 해야지.”

 

“비아냥거리지 말아.”

 

해준의 동생은 한참동안 못마땅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이 부탁한 건 들어줘야지.”

 

“고맙다.”

 

“그러나 잊지마. 나는 형을 존경한다는 것을. 그리고 형은 언제나 올곧게 서있어야 우리 형이야.”

 

“그래.”

 

“나는 제멋대로 살고 사람들의 무시를 받고 살아도 형은 그래선 안된다고. 알아? 형은 내 자부심이야. 여자를 만나더라도 형의 지위를 어그러뜨린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아.”

 

“알아. 도와줄 거지?”

 

“좋아. 나 진해랑의 이름을 걸고 이 일은 해결할게. 하지만 대가가 무언지는 내 맘이야.”

 

“……대가랑 떼쓰는 거랑 구분을 잘 해야 할 거야.”

 

“떼쓰지는 않을게. 내가 취하는 것을 부탁하지는 않는 주의라서.”

 

진해랑은 어깨를 젖히고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그 때, 바의 주인이 다가와 진해랑에 작게 나가주십사를 부탁했다. 바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진해랑은 씨익 웃었다.

 

“돈이 더 필요해? 더 사줘? 양주 몇 병쯤 더 시켜줄까?”

 

“죄송합니다. 책임지고 데리고 가겠습니다.”

 

진해랑이 자극되어 비웃음을 거두지 않았지만 해준은 그런 해랑을 달래어 끌고 나갔다. 해랑은 거의 해준의 손에 떠밀려서 밖으로 나갔다.

 

“하여튼 걱정이야. 난. 형이 걱정되서 미치겠다고.”

 

“내가 더 걱정이다. 좀 공손해져라.”

 

해준은 오래간만에 언성을 높였다. 요즘은 SNS가 발달해있어 사소한 행동거지도 조심해야할 판국에 해랑은 집안의 이단아답게 무모하고 무례했다.

 

“형 그래서 사업하겠수?”

 

“뭐라고?”

 

“시키는대로만 해서야.”

 

해랑은 어깨를 으쓱했다. 해준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인간은 스승이 있어서 발전해온 거야. 일단 배운 대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형다운 말이네. 나도 형이 발전하는 건 좋게 생각해.”

 

“좋아. 그럼 술집에서 무례하게 굴지 않는 거다. 집안의 명예가 걸려있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형이 있을 때라면 조심하도록 할게. 어쨌든 다 갚을 수 있게 도우란 말이지. 알았어. 알았다구. 난 내 애마가 여기 있으니 이만 갈게.”

 

샛노란 색과 새빨간 색으로 도색되어 있는 큰 바이크를 타고 해랑은 씨익 웃었다. 해준으로서도 더 이상 말릴 생각은 없었다.

 

“헬맷쓰고.”

 

“알았어. 잔소리 그만.”

 

해랑은 그 말을 남기고 부아앙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해준은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해랑을 엮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그 여자에게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가장 빠른 길이다. 해랑은 빠른 길로 간다. 해준은 돌아섰다.

 

 

해준이 그럴 때, 진형은 밤을 새우고 있었다. 웹툰은 이미 올렸지만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사연을 그려 올린 뒤로 끊임없이 SNS를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메일로도 몇 통이 들어왔다. 그러나 몇 개의 메일을 열어봤지만 다 허탕이었다. 올라온 사진은 달랐고 하소연을 끝까지 읽어보고 간단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새 새벽 3시였다.

 

‘좀 자두는 게 좋겠지?’

 

언제 올라올지 모르는 일이라 잠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진형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눈을 감아보았다. 흐릿한 불빛이 지끈 올라온다.

너무 몰입한 것 같다.

 

진해준은 이 일을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을까. 재벌인데도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왜 그에게 묘한 경쟁심이 드는지.

 

‘이 일은 내가 먼저 해결하겠어……….’

 

진형은 틈틈이 다음 화도 절반 정도 그려놓은 상태였다. 웹툰의 경쟁자는 아니지만 묘한 경쟁심리가 자신을 각성시켜 놓았다.

 

‘먼저 해결하려면 일단 자고 나서 쌩쌩해야겠지.’

 

진형은 꾸역꾸역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진형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질 나쁜 수면을 취한 듯 찝찝하게 몽롱한 와중에도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이선이라고 떠 있었다.

 

진형은 눈을 비비고 일어서서 아아! 크게 소리를 내뱉어보았다. 최대한 말짱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덜 깼어?”

 

그러나 이선은 바로 알아챈다.

 

“아니, 음, 네 전화로 깼지.”

 

“네가 나한테 알려준 네 SNS 있잖아.”

 

그러고 보니 어제 이선에게 SNS의 비밀번호를 알려줬었다. 아무리 친하다지만 알려줘도 될까? 싶었지만 이선이였고 범인을 빨리 잡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까먹고 있었다.

 

“그랬었지.”

 

“거기 아침에 확인해봤는데 사진이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아.”

 

“뭐라고?”

 

잠이 바로 싹 가셨다. 진형은 바로 컴퓨터를 켰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보았다. 휴대폰을 놔두고 왜 컴퓨터를 켰지?

 

“이선아. 확인해볼 테니까 전화 잠깐 끄자!”

 

“그래. 확인해봐. 시호역 근처인 것 같았어! 나도 잠시 갔으면 좋겠는데.”

 

“아냐. 넌 천우씨랑 같이 있어. 꼭 거기 있어야 한다?”

 

그런 놈에게 눈도장이 찍혀 좋아질 일이라고는 전혀 없다. 진형은 신신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달리며 SNS를 보았다. 사람이 모이면 과연 대단하다. 없는 새에 꽤 많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는데, 유독 한 사진에 ‘저도 이 사람에게 당했어요’라는 댓글이 세 개가 달려있었다. 그 사진은 그 사기 결혼을 당했다는 여자가 준 사진의 얼굴과 흡사했다. 그 댓글 밑으로 10분 전, 시호역에 있나 봐요. 라는 댓글과 함께 몰래 찍은 옆 사진이 걸려있었다.

 

시호역은 20분은 걸린다. 진형은 죽자사자 뛰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까지 쿵쾅쿵쾅 울린다. 전철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쪽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 사진이 찍힌 배경을 다시 확인해보니 분명 여기였다. 뛰어오니 10분 만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그 범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헉……헉…….”

  

진형은 무릎을 잡고 잠시 쉬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틀림없이 이 근처에 있을 터.

 

거리는 번잡하고 복잡해서 숨기 좋았다.

 

부아아앙!

 

그때 폭주족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시선이 거기에 쏠렸다. 붉고 노란 오토바이. 참 화려하게도 치장했군. 진형은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늦기 전에 찾아야 했다.

 

사진을 다시 한번 되살폈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을까?

 

전체적으로 축 늘어진 옷을 입고 낡아 있어 추레한 옷차림이었고 손에는 화려하지 않은 보석함을 쥐고 있었다. 아마 안에는 반지나 목걸이가 들어 있을 것 같다. 진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에 시호역 보석상을 검색했다. 한 군데가 있었다.

 

보석상에 들어갔을 때는 땀으로 온통 얼굴이 젖어있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말끔한 중년의 남자가 걱정스레 진형을 보았다.

 

“이 사람, 혹시 못 보셨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근처에 보석상은 없습니까?”

 

“음 보석을 취급하는 곳은 없죠. 우리 가게 말고는…….”

 

“그렇습니까.”

 

진형은 숨을 고를 수 있어 좀 진정이 되었지만, 그보다 좌절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 팔 수 있는 곳은 있어요. 요 옆에 전당포가 있어서.”

 

“그래요?”

 

진형의 눈이 번쩍 띠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가게 주인은 여전히 점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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