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주 2023. 10. 2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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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은 음료수를 다섯 개 뽑아 미리에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미리는 수줍게 음료수를 받고 이선의 부모님에게도 인사를 했다. 미리는 맞은편의 침대를 쓰고 있었다. 환자로 보이는 분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할아버지가 입원하셨어. 너는?”

 

“저는 어머니가.”

 

“그렇구나. 별로 좋지 않은 곳에서 만났네.”

 

“그렇네요.”

 

미리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 서먹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미리가 말했다.

 

“여기선 제가 터줏대감이에요.”

 

“그렇구나. 나도 자주 올 것 같아.”

 

미리와 이선이 이야기하고 있자 이선의 아버지는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선의 어머니는 이선을 불렀다. 이선은 고개를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간병인은 고용했고 너라도 자주 찾아와라. 우린 내려갈 테니까.”

 

“알았어요.”

 

이선은 대꾸했다. 다행히 병원은 이선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선은 멍하니 누워있는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이선을 보았다.

 

“아버지랑 싸우면 너만 손해지.”

 

“아빠가 자꾸 가게를 팔라잖아요.”

 

“그래. 할아버지는 너를 응원했단다.”

 

“네. 그 가게는 할아버지가 가꾼 땅에 세워진 거잖아요. 응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절대 팔지 말거라.”

 

그는 허허 웃으며 손녀딸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이선은 싱긋 웃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미리가 끼어들었다.

 

“저도 파는 거 반대예요. 근데 팔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냥 하는 말씀이지. 뭐.”

 

이선은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손을 내저었다.

 

“오늘 언니네 가게에 가려고 했는데! 커피도 마시면서 오빠도 기다리고.”

 

“아 그 오빠……. 커피숍은 오늘 쉬는 날이라 열지 않는데. 그런데 어머니 병실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곧 오빠가 와요. 쌍둥이 오빠예요. 성격은 완전 다르지만. 바톤터치하면 각자 할 일 하고 그래요.”

 

“그렇구나. 전에 봤던?”

 

그때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미리와 한 남자 학생이 떠올랐다.

 

“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미리는 뭔가 생각난 듯이, 이선을 보았다. 행동이 큼직큼직한 아이였다.

 

“아 참, 언니! 오빠 웹툰 봤어요! 그녀는 사이보그! 재미있던데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진형은 봐달라고 끊임없이 어필했지만 한 번도 진형의 만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 번 제대로 봐야겠다. 이선은 다짐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꼭 봐야겠어.”

 

“안 본 거예요? 에이~. 빈말 아니고 재미있어요. 좀 애절하고 비극적인 느낌이라 대중적인 인기는 없을 것 같았지만 몰입해서 봤어요.”

 

“그래? 어떤 내용이야?”

 

“감정이 없는 사이보그를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남자주인공은 사랑해서 온갖 일을 다 하는데, 여자주인공은 말 그대로 사이보그. 그런 이야기죠.”

 

“으으……. 솔직히 재미없어 보여.”

 

“아녜요! 재미있어요! 특히, 특히, 그림체가 끝내준다니까요!”

 

정말 팬이구나. 이선은 순수한 미리의 애정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몇 분을 수다 떨고 있자니 곧 미리의 오빠로 보이는 남학생이 나타났다. 그때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상당히 닮아있다. 남자인데도 예쁜 느낌이 있는 얼굴이었다. 내성적이고 조용해 보이는 느낌의 학생이었다. 속으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리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선에게 가볍게 얼굴을 끄덕여서 인사했다. 미리는 활기차게 이선의 손을 잡고 병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미리와 함께 병원 밖으로 나서는데, 미리가 활짝 웃으며 멈추어 섰다. 뭔가를 발견한 듯했다. 이선은 미리가 멈추자 자신도 발길을 멈추었다.

 

“오빠?”

 

“진형이?”

 

병원의 입구에 진형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꽃 한 다발을 들고 걸어오다가 둘을 마주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할아버지 입원하셨다길래.”

 

진형은 이선에게 꽃을 건넸다. 안개꽃이 가득 꽂힌 부품한 꽃다발이었다.

 

“어어, 고마워. 어떻게 알고.”

 

“어제 어디 입원할지 물어봤잖아.”

 

“근데 네 뒤에 사람은?”

 

“엉?”

 

진형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검은 승용차와 함께 진해준이 서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빙그레 웃으며 진형에게 대고 차 키를 흔들었다.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냥 당신이 눈에 띌 뿐이야. 내 꽃을 받아주겠어요?”

 

“이, 이게 뭐죠?”

 

이선은 얼떨떨하게 꽃을 받았다.

 

“카두풀이라는 꽃인데 스리랑카에서 밤에만 피죠. 피었을 때 재빨리 박제해서 가져왔죠. 그대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고, 고맙습니다.”

 

“이것 저것 고민했는데 희귀한 게 좋겠더군요.”

 

“조금 부담스럽네요.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 신기해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신기해하고 재미를 느끼는 것이 삶의 활력소죠.”

 

진해준은 싱긋 웃었다. 진형은 진해준의 능청스러운 태도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때요? 할아버지를 1인실로 옮기는 것은.”

 

“네? 말씀은 고맙지만…….”

 

이선은 갑작스러운 말에 적잖게 놀랐다.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금전적인 부담도 내가 할 거고요. 부담은 느끼지 말아요. 연애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와 데이트 한 번이면 충분히 그 값어치가 됩니다.”

 

이선은 잠시 생각했다. 할아버지를 더 편한 곳에 모실 수 있다면, 유혹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옆에서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방미리를 보자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미리의 어머니도 장기간 입원이라고 하셨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어요.”

 

“그, 그래요?”

 

“네. 죄송해요.”

 

이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으윽, 마상이.”

 

진해준은 무릎을 꿇으며 아픈 척을 했다. 이선은 놀라 해준을 부축했다.

 

“마상이요?”

 

이선은 부축하며 물었다.

 

“마음의 상처 말입니다.”

 

“…….”

 

도무지 웃어주고 싶지 않은 유머다.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자 더더욱 괘씸하다. 그보다 HG그룹의 전무가 이렇게 썰렁한 농담을 해도 되는 건가? 어린 나이에도 전무이다 보니 모두 다 개그에 억지로 깔깔 넘어가서 사람이 이 모양이 된 건가? 썰렁해진 분위기에 진해준은 혼자 하하 웃었다.

 

“그러니…… 나와 데이트해주지 않겠습니까? 난 용기를 낸 겁니다.”

 

“데이트 정도라면…… 해드릴게요. 신경 써주셨으니까.”

 

이선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진형의 얼굴이 붉어졌다. 참고 있었지만 더 참지는 못할 것 같다. 진형은 이선의 팔을 낚아챘다.

 

“네가 왜 해!”

 

“제삼자는 빠져있어요.”

 

해준은 진형의 팔을 잡고 천천히 뒤로 밀었다.

 

“파티에 참석하는데 파트너가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니, 와주면 고맙죠. 정말로 와주시겠어요?”

 

“그런데 파티라면 제가 잘 몰라서.”

 

“와주기만 하면 돼요. 곤란하던 중이었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런데 병실 안까지는 안 오시는 편이 좋겠어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거든요.”

 

이미 몇몇 사람들이 구경을 와 있었다. HG그룹의 진해준을 둘러싸고 띄엄띄엄 둥그런 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HG그룹의 후계자로 유명하니 얼굴도 알려진 편이었다. 병원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알아본 모양이었다.

 

“곤란하게는 하지 않겠습니다. 커피숍에서 뵙죠.”

 

진해준은 싱긋 웃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선탠이 되어있어 차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햇살 아래서 검게 빛나는 해준의 차량이 병원 입구를 맴돌더니 이내 빠져나갔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고 지나간 자리에는 황폐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진형이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내가 저런 걸 달고 오다니!”

 

진형의 개를 닮은 눈망울은 자신에 대한 원망과 저주로 가득했다. 이선은 그러나 진형이 준 꽃을 꼭 쥐어보았다. 카네이션과 자신이 예전에 좋아한다고 했던 안개꽃이 가득 담겨있다. 그리고 해준이 준 카두풀도 신기하게 생긴 것 같아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정원을 가꾸시던 할아버지니까 신기한 식물이라면 좋아하실 것 같다. 이선은 진형을 두고 병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형은 탄식하면서도 미리와 함께 뒤를 졸졸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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