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을 넘지마 4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서, 정작 힘을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선이었다. 저녁을 먹지 않고 헤어져서 집에 돌아온 이선은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적자가 불 보듯 뻔했다. 오늘도 충동 구매를 몇 개나 한 건지. 수입은 매달 100만 원도 되지 않았는데 나가는 돈은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선은 방 안 서랍 위에 잔뜩 쌓인 인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버리기는 싫어서 모아두고 있지만, 진형이 사격장에 갈 때마다 받아온 인형이 이제는 처리 곤란의 수준이다.
미뤄둔 카톡에 답장을 시작한 이선은 한 톡에 답장이 멈춰버렸다.
-오빠 연락처 가르쳐주세요. 언니. 제발요.
오늘 아이들에게 당하고 있던 아이의 톡이다.
‘이런 건 정말 약하단 말이야.’
진형이 싫다고 했으니 가르쳐주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 얘기도 이미 보냈지만 아이는 계속 조르고 있었다. 미묘하게 싫은 감정이 드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얘는 팬심이잖아.’
그런 자신의 감정에 왠지 모르게 반발심이 들어서 이선은 결국 아이에게 자신의 커피숍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내 가게인데, 그 오빠도 가끔 오니까.
뭔가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톡은 간 후였다.
-야호!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앨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이선은 자신을 나무라며 휴대폰덮개를 닫았다.
진형은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서비스로 내온 따뜻한 녹차가 두 사람 사이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떨어진 A툰이라는 곳에서 다시 올 수 있냐는 물음을 받고 진형은 바로 달려갔는데, 뭐든지 하겠다는 처음의 각오와는 달리 담당자의 말에 고심하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자 이따금 들리는 창밖의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매웠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담당자는 크흠, 헛기침하더니 진형의 대답을 재촉하듯이 말했다.
“그림체가 관능적이어서 말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당장 답을 주셨으면 좋겠지만 곤란하다면 일주일간 기다려드리지요. 웬만하면 빨리 결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량에도 자신이 있으신 것 같고 해서 권해드리는 거니까요.”
“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담당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형은 일어서서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진형은 후우, 긴 숨을 찬바람에 흘려보내며 슬슬 걸었다.
‘갈 곳은 거기밖에 없겠지?’
그 시각. 바리스타 정에서는 한 남자가 시선을 끌고 있었다.
혼자 카페에 들어와 바에 앉더니 에스프레소를 시킨 후, 원샷. 아침도 아닌 시각에서는 희귀한 일이었다. 사실 화제가 됐던 것은 이런 남자의 행동만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짧은, 단정한 머리에 슬림한 몸매, 선이 날카로운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주변의 시선도 꺄아악,이나 와아!라는 반응보다는 넋을 잃고 홀린 듯이 쳐다보게 되는 그런 위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는데 그는 이선에게 다가가 매너 좋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젊은 분인데 장사를 하시는군요.”
“네, 뭐.”
“난 HG그룹 전무, 진해준입니다. 아버지가 회장이셔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전무를 맡게 되었어요.”
“그런가요? 대단한 분이셨군요.”
“제 번호입니다.”
그는 명함을 건넸다. 이선은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들였다.
“전화하세요. 일주일 째 여길 오는데, 당신이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때, 문에 달린 벨이 딸랑, 울렸다. 진형이 지친 표정으로 들어와 창가에 비어있는 탁자에 탁 앉았다. 이선은 고개를 까닥하고 “감사합니다만.”이라고 말을 끊고는 진형에게 다가갔다. 해준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따금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이런 커피숍의 주인이라면 보나 마나 자신에게 껌뻑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자신이 좋다고 난리이지 않은가. 진해준은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 해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선은 진형의 등을 툭 쳤다.
“인디아로 내릴까?”
“응. 오늘은 이 시간에도 손님이 있네.”
“진상에 가깝긴 하지만.”
이선은 진형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했다. 그 밀착된 행동을 보자 진해준은 더욱 가슴에 스크레치가 났다.
“흠, 다음에 오겠습니다.”
진해준은 벌게진 얼굴로 이 자리를 뜨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런 패배감이라니. 몹시 화가 난다.
“네! 안녕히 가세요!”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주인의 목소리는 밝았다. 남자친구인가? 진해준은 시선을 진형에게 붙박아두고 밖으로 나섰다. 진형은 그런 해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처음 본 인물이지만 인물이 좋아서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가자 엔진소리가 큼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밖에 좋은 차가 있던데. 저 사람 건가?”
“아아, 그런 모양이야.”
이선의 표정은 싸늘했다.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저렇게 자기소개 대신 자신의 직위를 드러내고, 차 키를 드러내며 허세와 위압감을 주는 사람은 잘 없었다. 그런 행동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잘 못 봤지만 남자인데도 아름다운 느낌이네.”
“음, 그래? 외모야 그렇지만 속도 그럴지는 모르고.”
“왜 그렇게 까칠한 거야?
“별일 아냐. 음, 그래도 말해두는 게 좋으려나? 번호를 물어보더라고.”
“뭐 네가 좋다고?”
“전화 달라고 하던데?”
“저 사람도 취향 참 별나다.”
“아니거든. 보편타당한 취향이지.”
이선이 못 박았다.
“조심해. 너. 저렇게 돈 많고 잘생긴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너를 찝쩍거리겠어?”
“웬 히스테리야? 떨어졌어?”
진형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선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꺼내놓은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떨어지면 뭐 어때!”
이선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진형의 넓은 어깨가 추욱 쳐지더니 점점 더 내려갔다.
“떨어지는 것보다 더 고민이야.”
“뭐?”
“아아아악!”
진형은 비명을 지르더니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이래?”
이선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냉정한 표정으로 진형을 바라보았다.
“나보고 성인물을 그리라고 하는데, 난 그리고 싶지 않아! 전체 연령가로 성공하는 게 내 목표라구!”
“성인물을 그리래?”
“말이 성인물이지 그냥 야한 만화지. 뭐.”
“뭐 줄거리 있게 잘만 그리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선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나는 풋풋한 연애담을 그리고 싶단 말이야. 내 처음의 뜻과는 너무 다르고, 돈에 맞춰 작품을 뜯어고치고 싶지 않아! 야한 만화도 그리고 싶은 사람들이 잘 그리는 거라고. 나 같은 풋내기가 억지로 야한 걸 짜내봤자 얼마나 재밌겠어.”
“그럼 네 뜻대로 해.”
“하지만.”
진형은 이제 진로에 대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털어놓을 수 없어 그저 고뇌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이선과 친하다고 해서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좀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면……. 너와도 좀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좀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텐데.
진형은 일주일간 매일 카페에 나와 그림을 그렸다. 이선은 뭐라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열중한 진형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져 멀뚱히 보고 있었다.
“오빠!”
그런 진형의 앞에 스스럼없이 앉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진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보았다. 웬 낯선 여자아이가 뻔뻔스럽게 앉아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길었고 눈동자가 커서 미인형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앳되어 보였다.
“……누구?”
“저번에 번화가에서 구해주셨잖아요! 전 방미리라고 해요. 언니가 오빠가 여기에 자주 오신다고 해서 왔는데 진짜로 있네요!”
“아 그래.”
이선이 녀석, 결국은 말했구나.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선이 작은 여자아이 타입에는 한없이 약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럴 때였다.
“뭐 하세요?”
“…….”
보면 알 텐데. 진형은 그러나 그런 볼멘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방미리는 알아서 맞장구를 쳤다.
“웹툰 그리시나 봐요! 멋있어요!”
“멋있지 않아.”
“에이, 겸손하시긴.”
“나는 성인물을 그리는 사람이니까.”
푸훕, 방미리는 머금고 있던 커피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