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장편/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네(역사)

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네 19화

강복주 2023. 6. 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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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에서 벗어난 몇 년의 세월은 힘들긴 하였으나 궁궐에서의 시간보다는 훌쩍 흘러갔다. 궁궐에는 자신이 없었으나 별로 달라진 것없이 굳건히 서있었고 소란이나 민란도 끊이지 않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서울의 곳곳에는 서양인들이 살기 시작했고 특이한 그들의 외모는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모부터하여, 행색, 들고 다니는 물건, 말 등등 그 모든 것이 이상했다. 그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짓는 가장 큰 것은 검게 생긴 상자였다.

그들은 그 상자를 들고 사람에게 갖다대는 일이 잦았다. 그 기계에서 나오는 것은 현실과 똑같은 그림이었고 선영이 그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드는 느낌은 무척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선영은 이회가 그 기계에서 나오는 얇고 검은 것을 쭉 빼내어 그림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서 그를 보았다. 그림도 소름끼치도록 현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저 새까만 공간에서 그림을 만들었단 말인가요?”

, 말하자면 그렇지만 다 이 기계가 한 것이죠. 내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오. 저 암흑 속에서 어떻게 그림을 그리겠소.”

이 기계요?”

사진기라 부릅니다. 신기하죠?”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군요.”

엄선영은 꺼리는 표정을 지으며 폭탄이라도 만지듯 조심스럽게 그 기계를 만졌다.

서양인들은 전부 이런 것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소.”

그렇지요. 그들은 이 곳이 신기할테니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이 그림으로 남기려고 하는 것이요.”

기밀을 빼가려는 것은 아니겠죠.”

엄선영의 말에 이회는 어깨를 으쓱하는 서양인 특유의 자세를 취해보였다. 그 말대로 서양인과 조선인들은 서로 신기해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대부분 사진찍는 것을 거렸기에 사진을 찍어 몰래 보관하고 있었다. 궁궐에서도 종종 서양인들을 볼 기회는 있었지만 엄선영은 이회의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궁궐에서 보던 이들과 더욱 자주 볼 기회가 생겼다. 이회의 무역은 대부분 서양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파는 것은 식료품부터 기계나 물품까지 다양했다.

특히 이회는 알렌과 친하여 미국공사관에 있었던 적도 있었으며 왕래가 잦은 터였다. 알렌은 조선을 요양지로 생각하며 늘 유유자적하였으며 조선에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의원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선영에게 있어 가장 큰 소득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웨베르 공사의 먼친척인 앙트와네트 손탁을 발견한 것이었다. 늘 침착하고 온유하며 약간은 방관적인 웨베르를 보았을 때도 선영은 체면을 버리고 반가워하였으나 손탁의 익숙한 얼굴을 보았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만나 뵙고 싶었는데 얼굴이 익지 않으신지요.”

물건을 배달하러 가서 선영은 손탁의 손을 염치불구하고 잡았다. 손탁은 깜짝 놀라며,

저번에 보았던 궁녀가 아니오. 이 나라에서는 궁녀가 장사도 하나요?”

라고 물었다.

손탁의 푸른 눈은 아름다웠다. 풍성한 금발은 한국식으로 쪽을 지어 위로 올렸고 풍만한 원피스를 입고 가슴에는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쫓겨났는데, 늘 당신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오히려 궐이 아닌 지금이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조선의 궁녀라니 저야말로 더욱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손탁은 웨베르러시아공사의 먼 친척으로 조선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 선영도 손탁도 서로 독신이라 통하는 바가 있었고 나이도 비슷했으며 손탁은 독어, 불어, 영어에 조선말까지 유창하게 하는 실력자였다. 선영은 손탁을 보며 매번 감탄했고 손탁도 그런 선영을 마음에 들어하여 서양식 풍물에 대해 사진을 보이고 설명하고는 하였다.

다음에 올 때는 맛있는 서양식 요리를 해줄게요. 여긴 식료품이 비싸서 자주 해줄 수는 없지만.”

어느 날, 손탁은 그렇게 말하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다음에 선영이 러시아공사관을 방문했을 때, 손탁은 그 약속을 지켜 닭고기가 든 스프와 돼지고기 안에 감자와 양파를 다져넣고 마늘과 함께 통째로 구워 그 위에 사과시럽을 얹어주었다. 엄선영은 별세계에 온 것처럼 놀란 눈을 했다. ‘서양식에 매료된 것이다.

한편으로 선영은 궁궐음식이 그립기도 했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궐 안이라면 토란탕을 끓이고 꿀과 배와 유자를 넣어 향긋한 유자화채를 먹기도 하였을 것이다. 문득 그 것이 생각나서 선영은 답례로 손탁에게 유자화채를 만들어 가져다 주었다. 손탁은 입을 크게 벌리고 기뻐했다.

손탁과 친해지면서부터 엄선영은 외국인들의 사회에서도 은밀히 섞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히 폐쇄적이어서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소문과 계략이 무성했다. 선영은 종종 궁궐 안에서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였다.

 

미국 공사관은 미국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선영은 배달을 지시받고 바삐 공사관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미국공사관 서기가 바구니를 들고 있던 선영을 위아래로 보았다.

얼마요?”

엄선영은 여기서 새로이 접한 음식이 많았다. 버터라거나 잼이라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맛도 보았지만 양념이라고는 하는데 느끼하여 처음에는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기가 친절하게 빵에 잼과 버터를 발라준 이후로는 가끔씩 그 맛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버터는 비쌌다. 엄선영은 버터 6파운드를 내밀고 말했다.

“3불이오이다.”

비싸.”

열악한 환경에서 들여오는 입장도 생각해주소서.”

바깥생활을 하는 동안에 너스레도 늘었다. 공사관서기는 돈을 지불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월급이 50달러인데. 여기서 더 쓰면 어떻게?”

서기는 서툰 한국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엄선영이 웃고 있자 서기는 고민을 털어놨다.

이봐, 혹시 사진을 가져갔소?”

사진이요? 모릅니다.”

누가 들고가서 도둑 맞았는데…….”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엄선영은 별 것 아니리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의 고민은 곧 심각한 사태가 되었다. 정동에서는 서양인들의 소식을 매우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서양인들이 사는 동네답게 다른 동네와는 달리 밤에도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 곳의 정체성을 알리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이회가 빠른 걸음으로 물건을 정리했다. 가게를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죠?”

어린이가 죽었는데 조선인들이 화가 나 정동으로 쳐들어올 듯합디다.”

왜 서양인들에게 화가 났죠?”

사진이 유출됐는데, 사진에 찍힌 아이가 죽었소! 두 명이나 잔혹하게 살해되어 발견되었다하는데 이건 음모요! 어찌 사진에게 찍힌 아이만 잔혹하게 살해당할 수가 있지?”

이회는 흥분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엄선영은 사태를 들었다.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납치해 죽이고 그 눈을 빼서 끓는 물에 넣은 후 밀가루와 섞어 갈아낸 다음에 유리판에 펼쳐 말린 것이 사진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소문이 도는 통에 사진에 찍힌 두 아이가 잔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사람들은 그 소문을 진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야!”

미국공사관 서기가 외쳤다.

그 사람 밖에 없는 것같군. 사회를 혼란시키고 서양인들에 대한 반감을 키워 왕을 폐위시키려는 대원군의 속셈이 틀림없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어. 참으로 잔인한 자요.”

이회도 그 말에 동조했다. 엄선영은 아득해졌다. 대원군, 대원군. 그리고 전하.

선영은 복잡한 생각 속에서도 물품들을 빠르게 치웠다. 물건을 보이지 않고 문을 닫아야했다. 언제 그들이 이 곳을 습격할지 몰랐다. 이 속에서도 정치계략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미국 공사관에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미해군을 불렀다고 했다.

함장은 불쾌해했지만 온다고 하였소. 또 다른 나라 군대들도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몰려올 것 같소. 며칠만 더 버티면 안전하겠지.”

이회는 며칠 간 여러 공사관을 오가고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미해군 28명이 나타나고 바로 다음날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땅을 밟았다. 고종은 그 동안의 소문에 대한 해명과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 동안 어린이를 잡아먹고 아이를 재료로 사진과 약을 만들며 여자의 가슴을 잘라 우유를 먹는다는 소문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 이후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하였으나 엄선영은 이회의 회사로 가는 동안 사람들의 눈을 보는 것이 꽤 두렵기도 하였다.

 

서양인들은 조선에서 밉보이고 있었다.

선영은 외세의 침탈에, 서학이라고 불리는 천주교와는 또 다른 동학이란 것이 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고 뿌리가 흔들린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청과 일본은 물론 모든 서양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나타낸 것이다.

나라의 위에서는 개방을 하고 개화를 하고자 하였고 나라의 민중들은 모두 외세를 거부하고 있었다.

1893, 동학교도 40명이 경복궁 광화문에 꿇어앉아 교주 최제우의 억울한 죄명을 벗길 것을 외치고 있었다. 교주 최제우가 죽은지 이미 30년이었으니 그새 동학의 세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외국인들을 배척하자는 요지의 상소는 열강 속에 놓여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조정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건중을 비롯한 신하들이 동학교도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은 그대로 승낙하여 주동자를 잡아들이고 모인 이들을 강제해산시켰다.

그러나 동학의 세력은 조정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선영은 손탁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 러시아공사관은 선영에게 있어 상당히 편안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가게의 문을 닫고 치즈를 배달하러 간 선영은 손탁이 커피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편안히 서양식 의자에 앉았다. 선영의 차림은 아직 한복이어서 주변의 서양식 가구와는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곧 금색테가 둘러진 찬에 커피가 따라져서 나왔다. 손탁은 선영의 맞은 편에 앉았다.

선영,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대요. 동학이 무엇인지 아나요?”

사람들이 믿는 종교 중에 하나에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종교에요.”

그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죠? 외국인들을 모두 죽여야한다고 한다고 말한다면서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하고 있어요. 서울로 몰려온대요.”

동학의 구호 중의 하나가 외세척결이었다. 선영은 마음이 착잡했다. 이회의 회사에서도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시끌벅적했었다. 그들이 외국인을 혐오한다면, 무역회사인 이회의 회사도 무사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을 거에요.”

엄청난 기세로 몰려온다고 하던데요.”

손탁은 불안한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나 이내 선영에게 말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싱긋 웃고 만다.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커피 마시다 체하겠어요. 편안히 마시고 돌아가요.”

 

선영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누! 외세척결이니 그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여기도 난리가 나겠구먼!”

오전에 회사의 직원들은 탄식했다. 그들이 탄식하는 속에서 엄선영은 더욱 탄식하였다. 끊이지 않는 조정의 혼란도 혼란이거늘 또 한 번의 민란이 안타까웠다. 그들이 나라를 위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배워야하리.’

엄선영은 그들이 다른 교육을 받으면 다른 생각을 하리라 믿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조정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배척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정이었다. 궁궐에서 나온 지금, 궁궐의 사정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으나 동학교도들이 서울까지 밀려온다고 하는 것은 그 민란을 막을 관군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여어, 궁녀.”

이 무역회사의 우두머리인 중국상인 이회는 엄선영을 부를 때 궁녀라고 부르고는 했다. 그 것은 엄선영의 자존심에 대한 농담이기도 하였는데 무역회사에서는 그 말이 이름 대신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소식들었소?”

서울로 동학군이 몰려온다는 것을 말씀하시오?”

아니……. 조선에서 힘이 없어 청군이 온다고 하던데. 한 천오백 여명 쯤.”

엄선영이 그를 보자 그는 엄선영의 눈빛이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나라는 가라앉고 있었다.

외교로 살아남되, 외세의 군사를 동원하는 그런 일만은 없어야했다. 허나 지금의 사태는 전쟁을 하는 것도 침략을 당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조선의 요청으로 외국의 군대가 들어와 자국의 백성을 처치하도록 하는 것. 최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천진조약을 들먹이고 있다던데.”

천진조약이라니요?”

서로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트집잡으며 그 쪽도 천 명이 넘는 군사를 보낸다고 하더군. 청일전쟁이 날 것 같소. , 청이 이기겠지만.”

그의 말은 태평스러웠다. 그는 엄선영의 기색을 잠시 살피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안된 일이오.”

왜 전쟁을 조선땅에서 하지요?”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엄선영의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상 아니오? 어떻소, 마음도 우울한데 오늘 나하고 한 잔…….”

괜찮습니다.”

엄선영은 욱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퇴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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