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네 15화
6. 가벼이 내린 사랑
그 일 이후로 주상과 중전은 엄선영을 안쓰럽게 여긴 것이 틀림없었다. 중전 역시 제 핏줄을 죽인 데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고자 하였으나 엄선영이 개화파에 품고 있던 마음은 충국지절이라 보았다. 임금의 생각도 같았다. 청군이 개화파 청년들을 죽인 것에 분노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이에 영리하나 과격하고 민심을 살필 줄 몰랐던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한 때 자신과 함께 공부하고 자신을 도와 외국의 문물을 가져왔던 청년들이었다. 성난 군중들은 일본공사관을 에워싸고 돌을 던졌고 일본병영과 군량미를 다 불태워 개화파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었지만 왕은 자신을 농락한 김옥균이었으나 그와 함께 나누었던 미래를 생각되어 마음이 아팠다.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은 임금에게도 간절했었으나, 청은 막무가내로 칼을 휘둘렀다. 처형의 형식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일본이든 청이든 조선의 발전을 꾀하던 눈엣가시인 개화파를 없애버리려고 한 속내가 분명했다. 한 쌍의 부부는 그 속내를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왕은 일본에게 항의했으나 일본과 체결한 조약은 굴욕적이었다. 죽은 일본인 유족과 부상자에게 보상할 것. 변상금 10만원을 지급할 것. 일본대위를 죽인 범인을 처형할 것. 불탄 일본 공사관 집터 제공과 건축비 2만원을 내놓을 것. 일본 호위병을 주둔 시킬 것. 조선을 뒤엎은 일본이었으나 변상은 조선이 해야하는 것에 왕은 분노하였으나 맞설 병력이 없는 이상 그 한성조약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이듬해 3월, 이토 히로부미는 천진에 가서 청궁의 이홍장과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청과 일본이 조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며 양국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을 것.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때는 상대국에 미리 알려야 하며 사건이 종결되면 군대를 즉각 철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왜도 청도 결코 믿지 못하리라는 게 분명해졌네. 심지어는 내 나라 사람들도.”
중전은 엄선영을 불러 말했다.
“이번 난리통에 내전의 시위상궁이 죽었네. 자네 알고 있는가?”
“원통한 일이옵니다.”
“내 선발 작업을 해야하는데 자네를 뽑을까해.”
“……!”
“어찌 그런 표정인가. 자네가 시위상궁을 하면 어떻겠냐는 말일세.”
참으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상궁직도 대단한 벼슬 중의 하나. 만일 엄선영이 오른다면 최연소로 상궁에 오른 이 중의 하나가 될 터였다.
“제가 어찌…….”
“겸손은. 충분히 가능하리. 그 동안 해온 일을 보면 잘 해내리라 믿네.”
중전은 마음에서 결단을 내린 듯하였다. 그래도 자신을 지지해주던 이들은 민씨 가문의 이들이고 보면 이번의 정변으로 중전은 자신의 오른손도 왼손도 잃어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엄선영은 중전 민씨의 수족 노릇을 잘 수행해오고 있었다. 엄선영은 갑작스런 지위에 놀라기도 했으나 설레기도 하였다.
‘상궁.’
어린 시절 아기 나인 때 바라기는 했으나 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막연하였고, 남들이 영리하다고 말하여주는 그 말에 도취되어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이렇게 빠르게 얻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직책이었다.
문득 최상궁마마님이 떠올랐다. 1년 여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말이 가슴을 찌른다. 아마 상전을 모시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조정의 일에 관련한다는 것을 그 분은 아직 마땅치 않아 하시리라. 그러나 지금 이러한 조선의 상황에서 어찌 관여하지 않을 수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놀라운 일이긴 하였다. 규율 상 정식 나인이 된 지 15년이 지나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스물에 정식나인이 되었던 선영의 나이는 이제 서른. 지금 이 나이에, 상궁.
“당황스러울걸세. 그러나 지금부터 준비하면 되리.”
“황공하옵니다. 마마.”
“나가보게.”
시위상궁이라 하면 늘 왕이며 왕비 옆에 붙어있는 직책이다. 엄선영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엄선영이 물러나서 나오는데, 저 멀리서 왕의 행차가 보였다. 수많은 궁녀들과 환관들이 따르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전하의 행차였다. 저 번의 실수를 기억하며 이 번에는 예법을 잘 갖추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이었다. 국왕은 점점 엄선영에게로 다가왔다. 임금을 모시는 환관은 역시 얼굴이 익은 이였다. 그는 눈짓으로 엄선영에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엄선영은 그 것이 어떤 신호라는 것만은 알았으나 임금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에는 당혹을 느꼈다.
“전하 내전은 옆에 있사옵니다.”
행방이 자신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아챈 엄선영이 말하는데, 왕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찾아왔네.”
“일개 천한 것을 어찌 찾아……황공하옵니다.”
“응. 자네 멍든 것은 괜찮은가?”
청군에게 구타당한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선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참으로…….”
엄선영은 주상의 눈시울이 약간 붉게 물든 것을 보았다. 자신이 느끼는 서러움이 어찌 왕에게 비할 것인가. 엄선영은 코언저리가 욱씬거렸다. 끝없는 열강의 침략과 끝없는 내부의 반란 속에서도 임금은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공부하고 연구하며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다. 역사를 배웠기에 변화해야만 산다고 생각하는 왕이었으나 그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백성에게서 민심을 잃고 변화하기 위해 조정을 뒤엎고자하는 이들의 칼날을 그대로 받았다.
“시간 내기도 여의치 않네. 이왕 본 참에 자네와 몇 마디 나누고 싶구나. 괜찮은가?”
“황공하옵니다.”
왕의 여자라 불리는, 종의 신분인 궁녀였다. 어찌 천한 것의 의사를 물어주는가. 선영은 임금의 선의에 감읍해 고개를 조아렸다.
‘상냥한 분. 상냥해서 슬픈 분이다.’
“너희들은 잠시 물러나라.”
“전하! 그 것은…….”
“예법은 안다. 잠시 이 자와 이번 정변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이 것은 비밀로 해두게. 곧 돌아갈테니 물러가라.”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어허, 너희도 나를 감시하느냐? 청이나 왜가 그러하듯이 과인의 뜻을 무시하느냐? 과인은 이 나라의 대체 무엇이냐?”
왕의 역정에 옆에 서있던 환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곧 일정이 있사옵니다. 전하.”
“알았대도!”
그래도 따라온 이들은 모두 왕의 심복이었다. 왕은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뜰을 거닐었고 그 왕의 뒤를 따라 엄선영이 움직였다. 그 역정을 낼 때 찌푸리는 얼굴도 어디선가 보았던 듯 하였다.
“자네는 왜 청군에게 대들었던가?”
임금이 물었다.
“조선의 여인이기 때문이옵니다.”
감히 무례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돌한 어투였다. 왕은 엄선영의 두터운 얼굴을 보다가 허허 웃었다.
“맞아. 여기는 조선이지. 조선이야.”
“전하께옵서는 김옥균대감과 가까이 지냈다 들었사옵니다.”
“대감? 그는 대감이 아닐세. 그런 배반자가, 제 임금을 농락하는 그런 자가 어찌 조선의 대감이야. 적게 나마 있던 조선의 신식병력도 이제 없다고 봐야하네.”
거기에 묻은 짙은 그림자는 미움만이 아니라 섭섭함이었으며 절망감이었다.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 들곤 하네.”
“전하, 조선은 가라앉지 않았사옵니다.”
엄선영은 여느 때 없이 대답이 당찼다. 임금은 멍하니 엄선영을 보았다. 저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기도 하였다.
“만백성의 어버이께서 약한 소리를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조선은 때를 기다릴 뿐이옵니다.”
임금은 그 말이 가슴을 때려오는 듯하였다. 자신이 약해지고 포기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무력한 자신이었지만 자신은 왕이었다. 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왕이 되었지만 누가 무어라하든 왕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임금은 선영을 보며 허허 웃었다.
“이제야 정신이 다시 좀 드는 듯 하네.”
선영은 쇠약해진 임금의 얼굴이 슬펐다. 임금은 허공을 보며 허허 웃었다.
“자네 이름을 기억해두지. 엄선영. 엄선영…….”
1885년, 경복궁의 재건작업이 끝났다. 종로 네거리로 창덕궁에 있던 왕가의 일행이 등장한 것을 보고 뭇사람들은 바글바글하게 모여 까치발을 들었다. 용을 그린 기수단이 알장서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뒤를 따르고 호랑이가죽을 쓴 어가가 지나고 왕세자가 탄 어가가 지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바라보며 ‘평생 이런 광경을 언제 보겠어.’하며 뿌듯해하거나 신기해했다.
시위상궁이 된 선영은 중전이 탄 어가의 옆을 따랐다. 지밀상궁은 왕과 중전 가까이에 밀착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군란 때 납치되셨던 대원군이 중국에서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뒤를 따르면서도 선영의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은 그 뿐이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은 조선은 신경쓰지 않고 청국과 이야기하려 했다. 명백히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본 처사였다. 조선이 항의하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일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왕비는 선영에게 조선이 살아남기 위하여 취할 정책은 이이제이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조선의 이권을 탐하는 강대국들을 견제시키고 그 속에서 조선의 안전을 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여 미국의 교관을 초청하기 위해 애썼으나 미국은 그 것을 거절했고 결국 청에서 파견된 밀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에서 교관파견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밀렌도르프는 갑신정변 때 다친 민영익을 구출한 보답으로 중전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중전 민씨와 뮐렌도르프의 친분을 알게 된 청은 일본이 제의한 조선변법 8개 조항을 받아들이고 밀렌도르프를 해고하였다. 청의 이홍장은 밀렌도르프가 추진했던 러시아교관 대신 미국교관을 청하도록 했다. 또한 중전 민씨를 견제하기 위하여 납치해갔던 흥선대원군을 다시 환국시키기로 하였다. 조선이 외국 강대국들을 서로 견제하게 하여 살아남으려는 이치와 똑같이 조선 내부를 서로 견제하게 하여 다스리려는 청의 속내였다.
자신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상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그는 두 번이나 찬탈을 꾀한 이였다. 타협을 모르는 이였다. 그러나 처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백성들은 대원군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 개화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갑신정변 때의 군중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늦은 시간, 왕은 바깥에서 명을 읊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지밀상궁 엄선영을 불렀다. 그 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온 전깃불은 호롱불과 달리 저녁에도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빛은 왕의 얼굴 구석구석을 비추어 그늘이 없도록 하였으나 왕의 얼굴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부터 깊숙이 지쳐있었다.
“어쩌겠느냐? 마음같아서는 막고 싶으나.”
늘 곁에 붙어있는 엄선영에게 임금은 마음으로 의지했다. 왕은 때때로 선영에게 하사품을 내려 정을 표해 주었다. 궁녀와 임금의 사이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중전 민씨였으나 엄상궁에게 가는 하사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그런 대답은 자네와 어울리지 않네. 아버님께서는 틀림없이 또 앞길을 막아서시겠지.”
“부자유친. 전하의 심중을 모르지 않사오나 마중을 가심이 마땅한 줄 아뢰오.”
“허허. 그 분이 없었다면 이토록 궁궐을 위협하는 난이 있었을까. 반란이 발각된 것도 모자라 임오군란을 부추기셨지. 임오군란으로 조정이 혼란하고 피를 보지 않았던들 갑신정변의 젊은이들이 조선의 궁궐을 그토록 쉽게 보았을까.”
“전하……원통하오나 가시는 것이 마땅하올 줄 아뢰오.”
“허허.”
1885년 8월 27일. 7,8천여명의 군중들이 배로 귀환한 흥선대원군을 환영하였으나 청국 이사관과 일본 영사 대리가 나왔을 뿐, 조선의 조정에서 나온 이는 없었다. 청에서 온 원세개가 인천부사를 불러 항의했다.
결국 왕은 귀양에서 돌아온 대원군을 맞이하기 위해 숭례문으로 행차를 했다. 인파는 북적북적하였으나 그 속에서 왕인 아들과 흥선대원군인 아버지는 서로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 왕을 엄선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무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