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장편/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네(역사)

그 꽃은 아직 지지 않았네 6화

강복주 2023. 5. 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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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화의 싹

 

, 큰 일 났소. 큰일.”

엄선영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숙양을 보고 놀랐으나 숙양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놀랐다.

참말인가!”

중전마마, 어이할꼬!”

민자영이 별궁에 들어온지 2년이 지났을 때, 내명부에는 큰 경사와 함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왕비없는 궁궐에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왕자는 상궁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주상의 첫 아이였다. 궐 안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주상전하는 고작 17세이시지 않은가?”

이상궁은 서른에 가까워오는데?”

사람들은 모두 놀라 아연해하였으나 한 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떨기 꽃같았던 이상궁의 외모때문이었다. 배추줄기를 씻어놓은 듯이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외모는 나이를 실감케 하지 않았고 누군들 반하기에는 충분한 듯하였다.

이상궁은 소의로 책봉되었다. 궁녀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씨와 아직 책봉되지 않았다하나 궁궐에 머물러 수업을 받고 있는 민씨에 대한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성은을 받은 이상궁은 철종 때부터 임금을 모시던 상궁이었으며 주상보다 나이가 열한살이나 많은 스물여덟이었다. 그 나이만으로도 사람들이 떠들만한 화젯거리는 충분했다. 주상이 첫아들을 보고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는 소식도 파다했다.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 하며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전이 될 민씨의 별궁에서는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민씨의 영민함이 때로는 예민함과 공격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녀를 보좌하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계속 파르르 떨고 있다는 것도 왕실의 소식에 능통한 지밀의 궁녀들의 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질투는 칠거지악으로 금지되어 있는 바, 궁녀들은 아직 중전이 되지 않은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린 주상의 바람기에 대해서 서로 조잘거리며 그 이야기도 한 때의 시끌함과 함께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엄선영은 중전의 침실에 보료를 깔고 나왔다. 선영이 중전의 침실에 보료를 까는 동안 민자영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소문을 들은 선영은 보료를 까는 동안의 시간이 가시방석이었다. 선영이 나오자마자 숙양이 물었다.

엄가, 어찌되었는가.”

아무말씀 없으셨네. 왕실의 핏줄이 늘어난 경사인데…… 어찌할 것이 있겠는가.”

아니, 그래도…….”

말은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왕실의 법도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왕실의 핏줄이 늘어난 것을 좋아해야만 했다. 허나, 가례를 1년 남겨두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궁녀들로서도 내심 아름답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선영은 무딘 듯 행동하고 있었으나 민자영의 눈치를 살펴 상황을 파악했다. 민자영이 화난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한 가지는 뭇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대로의 질투였으나 또 하나는 질투와는 다른,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심의 손상이 그 이유였다.

중전마마는 고아시다.’

양반이니 목을 곧추세우고 있어도 그 것은 민자영의 커다란 열등감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중전으로 세운 이유는 명문가, 양반이라는 좋은 허울에 비해 외척이 없고 빈천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의도를 파악해낼만큼 민자영은 영리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기에 가례가 1년 남은 시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민자영의 몸에 독기가 피어오르는 이유는 그 것이었다.

소문이 도는 동안 민자영은 하루종일 병법서를 읽었다. 엄선영은 처소에 갈 때마다 병법서를 읽는 민자영에게 혀를 내둘렀다. 한편으로 그 행동에 호기심이 생겨 자신도 병법서를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비밀이었다.

 

그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의례는 정식으로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자영은 중전 민씨가 되었고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가례는 육례라 하여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同牢)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국가의 가장 큰 일 중의 하나인 만큼 시간과 비용이 막대하였다.

납채(納采)란 간택된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대궐에서 사자(使者)를 보내 청혼하는 의식이다. 청혼이 승낙되면 납징(納徵)을 하게 되는데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징표로 대궐에서 사자로 하여금 별궁에 예물을 보낸다. 그런 다음 대궐에서 길일을 택해 가례일로 정하여 이를 별궁에 알려주니 그 것을 고기(告期)라 한다. 책비(冊妃)란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별궁에 사신을 보내 왕비를 책봉 받도록 하는 의식인데 이 것이 끝나면 친영(親迎)이라 하여 국왕이 직접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아들여 대궐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동뢰(同牢)를 치르는데 국왕이 왕비와 서로 절을 나눈 뒤에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것을 말했다. 준비에 몇 달. 혼례는 하루를 꼬박 보내는 행사였다. 내명부는 종일토록 바빴다.

 

마마님 어디에 가시오니까?”

엄선영은 기녀들이 화려하게 춤추던 무대를 정리하다 바삐 가는 상궁들을 발견하고 말을 건네었다.

첫날밤이 아닌가. 우리가 주상전하께 조언을 해드리는 것이 도리인 바.”

그러하오니까.”

늙은 상궁들이 문득 웃기 시작했다. 엄선영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평소 위엄있는 상궁들이었으나 저 아이보게, 하며 선영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즐거워하였다. 왕세손이 태어날지도 모르는 동침 시에는 상궁들이 옆에서 조언을 하게 되는 것이 왕실의 법도 가운데 하나였다. 마마님들이 지나간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선영은 번민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며 처소로 돌아갔다. 궁궐 속 법도는 엄하였고 만일 이 엄선영이 상궁이 된다고 하여도 어쩌면 저는 평생 혼자이리라.

과연 그 수밖에 없는가? 아침마다 바깥 나무에 노니는 새들도 짝이 있거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엄선영은 다른 방법을 쉽게 찾아냈다.

임금의 짝이 되면 가능하리.’

그러나 그 다른 방법은 가능성이 하염없이 낮은 것. 못생겼다 놀림밖에 받지 않았던 엄선영에게는 더욱 가망이 없어보이는 것이었다. 엄선영은 다시금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왕과 중전은 첫날밤을 치렀으나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소의 이씨의 아들은 자라나고 있었다.

혼례를 올린지 3년 째, 드디어 민비가 아이를 배었다.

궁 안의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새 왕손을 반겼으나 그 것을 누군가 질투했던 것인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왕손은 쇄항증이라 하여 항문이 막혀 있었다. 칼을 대야하느니, 왕손의 몸에 칼을 댈 수는 없으리니 떠들썩하였으나 결국 손을 대지 못하여 그는 태어난 지 나흘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렵게 얻은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도 중전 민씨는 아이를 쉽게 얻지 못하여 몇 년이 흘렀다.

점점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약해질수록 흥선대원군은 소의 이씨의 몸에서 난 선을 특히 총애하였다. 서자라 하여도 아이는 총명하였고 유순하였다.

중전 민씨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중궁전에는 중전 민씨만이 홀로 있는데도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나라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강력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위정척사가 가장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되었던 몇 년 전과는 또 세태가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세태와는 상관없이 조선의 외교방식은 견고했다. 서양의 모든 통상요구를 거절한지 몇 년. 서양은 물론 왕가 승인을 위해 찾아왔던 일본의 외교사절들 역시 3년 째 거절당하고 있었다. 일본만이 아니라 모든 외교의 요청을 조선은 거부했다. 위정척사비는 아직도 굳건히 각 땅에 서있었다.

조선의 기습공격에 무참히 물러갔던 66년의 셔먼호사건. 그 것을 굴욕으로 기억하고 있던 미국은 1871년의 따뜻한 봄날에 조선 원정을 결정했다. 군함 5, 병력 12백여 명, 함포 85문으로 무장한 미군이 강화도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기습 공격으로 대응했다. 훗날 손돌목 포격 사건이라 불리는 기습공격이었다. 그에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미국은 그 것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벌였고 조선군은 후퇴하여 그들은 강화도 초지진에 피를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조선군은 다시 광성보에서 요격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패하였다.

광성보에서 패함으로 인해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들은 조선의 대표를 기다렸으나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미군은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지만 군사적으로는 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성들은 또 다시 조선이 물리친 것으로 보고 안도하였으나 조정의 대신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외세가 물러났다고 하지만 그 것은 그들이 기다리다가 지친 것 뿐, 그들은 조선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것은 조선의 군사력에 대하여 적잖은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세계는 이상하게 바뀌고 있었다.

조선의 어수선함을 알아차렸는지 72, 일본은 외교를 다시 청하였으나 대원군의 대응은 여전히 강력했다. 메이지유신을 끝낸 일본은 뱀이 붉은 혀를 내밀며 독니를 드러내듯 동방을 찌르고 있었다.

수년 간의 쇄국. 본래 환영받았던 쇄국이었으나 이제는 조선의 내부에서도 불만이 생기고 있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인답시고 물가를 뒤흔드는 원납전을 발행하고 고된 노역을 시키는 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신문물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젊은 자제들의 원성이 모여 불씨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신념은 여전히 강력했고 그 것이 화약을 폭발하도록 누르는 화관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그 불만의 싹은 궁궐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그 불만의 싹 중 가장 견고하고 커다란 싹.

바로 주상 전하였다. 주상은 새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의 기에 눌려 여타 말을 하지 못했지만 민비가 국세정세를 보아 하루라도 빨리 문호를 열어 기술을 개발하고 닦아야한다는 말을 하면 마음 속으로나마 크게 동의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둘. 아버지의 밑에 있기에는 장성한 아들이었다. 마침 대원군은 조정에서 세금과 민심의 문제로 곤란한 터였다. 그러는 동안 최익현이 대원군을 규탄하였다. 그가 왕권을 유린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주상은 만족하며,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소인을 면치 못할게다.”

라고 환영하였다.

대원군에게는 배반이었다.

성균관의 유생은 그 상소에 반발하여 식사를 거부하였지만 주상은 끝까지 완고하여 주동자를 유배보내어 그 일을 마무리 지었다. 흥선대원군은 왕좌에 앉아 자신을 편들지 않는 아들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서 이제 자신의 권력이 다했음을 알았다. 뒷날을 기억하며 하야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찌……!”

수염을 떨며 분노하는 그에게 주상은 온화한 그의 생김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며 말했다.

나라가 바뀌고 있사와…… 그 동안 정세를 돌보시느라 원기를 축내셨으니 자식된 도리로서 아바마마가 염려되옵니다.”

말인즉 온화하였으나 그 동안의 불만이 묻어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쏘아보았으나 아들 역시 그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다음날, 왕은 대원군이 궐 안으로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

 

한편, 민비는 그 동안 한 아이를 더 낳았으나 그 공주도 222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1. 민비는 다시 한 번 임신을 하였다. 그녀는 절박하였다. 이번의 아이도 병약하고 잔병이 많았으나 내의원의 모든 이들이 동원되고 내명부의 모든 이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 고비를 넘겨 100일 잔치도, 돌잔치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총명한 이선을 총애하였고 주상 역시 그에게 많은 애정을 가져 궁녀의 몸에서 난 이선이 세자로 책봉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민비에게는 그 것이 크나큰 위협이었다. 궁녀는 천한 신분이었으며 궁녀가 정실이 된 전례가 없다. 중전인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터였다. 비록 첫 아이가 일찍 죽었으나 정실의 아이가 떳떳히 살아있는데 궁녀의 아이가 세자에 오르는 것이 어느 법도에 있단 말인가?

사람은 약할 때야 말로 가장 흉포해진다. 그녀는 자신의 친척들을 불러모으고 옛 노론의 세력들을 모아 의논하여 조정에서 그에 따른 반발을 토해내도록 요청했다. 상소와 더불어 많은 신하들의 반발이 생기자 왕은 수월하게 대원군을 물리치고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중전 민씨가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것은 자신의 아들을 위함이 적지 않다 할 수 있었다. 왕자 선을 귀애하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마당이었다. 마땅히 세자는 적자에게 가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 때에 민비는 다시 한 번 임신을 했다. 그러나 낳은 아이는 14일만에 죽고 말았다. 민비는 종일토록 통곡을 하였다. 이선을 세자로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왕이었지만 그 모습을 본 왕은 마음을 정했다.

척이 세자로 책봉되고 선은 완화군으로 책봉되었다.

겨우 두 살된 척이 어린나이에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소의 이씨와 완화군 선은 궐 밖에서 살게 되었다. 내쫓긴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세자다툼은 일단락 되었으나 민비는 커다란 위협을 맛본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세자자리는 쥐게 되었다. 권력에 손에 들어온 것이다.

민비는 이 권력이라는 것을 놓친 뒤에는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민씨 가문의 이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제각기 제 마음 속에 가득 들이찬 야심만이 비쳤다. 또한 그녀의 마음에도 야심은 있었다. 대상없이 떠도는, 피해망상과 같은 복수심도 있었다. 이렇게 아이를 유산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그녀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독을 먹인 것이 틀림없어. 궁궐은 그런 곳이리.’

민자영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피해의식은 세자책봉을 위해 청나라에게 과도한 뇌물을 바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규탄한 안동준을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안동준이 말한 것과 같이 실제로도 민자영은 여러나라에게 금전을 보내어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청국을 비롯한 각국의 인정을 받게 된 세자 척은 누구보다 견고한 세자자리를 확보했으니 안동준의 참형은 민감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동준의 극형이 지나친 처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외가 똑같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선영은 종종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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