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주 2023. 5. 2.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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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가 도착한 곳은 큰 사거리에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2층짜리 커피숍이었다. 사장이 직접 면접을 본다고 했다. 사장은 키가 큰 여자였다. 정이선이라는 명찰이 붙어있었다. 카페의 이름도 바리스타 정이다. 그녀는 채희에게 기본적인 질문만 던진 뒤, 내일부터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채희가 가능하다고 하자,

 

합격!”

 

이라고 하고는 다른 바리스타를 불러 교육을 지시했다. 기본적인 메뉴만 메모할 수 있도록 한 뒤 오늘은 돌려보내라는 말이었다.

 

로진은 심란했다. 그는 쉬는 동안 민훈에게 연락했다. 민훈은 요즘 재계 파티에 참석률이 저조하다고 로진을 다그쳤지만 그의 부름에 응했다.

 

채희를 다시 바래다주고 나서 로진은 꼭 어디갈 때 연락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채희는 알듯말듯한 미소로 답했는데, 그게 로진에게는 더욱 답답했다.

 

민훈과는 학교의 주차장에서 만났다. 학교에서는 늘 보기 때문에 그리 오랜만도 아닌 민훈이었지만 민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채희와 비슷한 물음을 던졌다.

 

웬 차냐?”

 

집 안에 있던 겁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셨겠는데?”

 

별 관심 없으십니다. 새어머니와 지내기도 바쁘시고.”

 

어머니는 뭐라 안하시고?”

 

흥진이도 있는데 저한테 돌아올 관심은 없지 않습니까.”

 

흥진은 로진의 친동생이었지만 새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로진에게 모든 관심과 사랑이 쏟아졌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흥진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은 관심 밖이었고 가정은 무미건조했지만 흥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 사랑이 다시 싹텄다. 아직 어린 흥진에게 그 사랑이 쏟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로진은 항상 소외감을 느꼈다.

 

왜일까.”

 

민훈의 말에 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화경이랑 너랑 닮은 부분이 있는 거 알아?”

 

욕입니다. 그건.”

 

첫사랑과 굳이 결혼까지 하려는 거……. 그게 참 닮았어.”

 

로진은 그때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민훈의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손과 발이 굳었다.

 

화경이가 채희를 납치했다더군요. 믿기지 않지만, 무슨 꿍꿍이인지 화학과에도 갔다고 하고요.”

 

처음 듣는 말인데.”

 

알아봐주십시오.”

 

그 부탁하려고 불렀군. , 알겠어. 내 장기가 사람이니까 소식은 금방 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울 거야. 경호팀을 좀 섭외해볼까? 너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으니…… 내 쪽에서 손쓰는 게 빠르겠구나.”

 

그래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걔를 포기하는 건 어떻겠니?”

 

그건……죄송합니다.”

 

걔를 포기한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나지 않을까?”

 

그래야만 한다면 차라리…… 제 아내로 맞이해 제 힘을 다해 보호할 겁니다.”

 

그래. 내가 괜한 말을 했다. 얼굴이나 좀 보여줘.”

 

자주 보고 있지 않습니까. 동아리실에서.”

 

로진이 빙긋 웃었다. 민훈도 피식 웃었다. 정말 괜한 말을 했다. 자신도 선아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할 수 없을 거면서. 결국 사람이란 이토록 감정적인 동물일까.

 

동아리에도 흉흉한 소문이 퍼져서…… 축제 이후에 영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형님이 일군 동아리인데 기분이 안 좋으시겠군요.”

 

.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으니까 말야. 화경이의 정체는 거의 탄로났어. 나야 감출 생각이 없었지만 너는 감춰왔는데 곧 소문의 대상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괜찮겠어?”

 

상관은 없습니다. 조용한 게 좋았을 뿐이니까요. 단지 우리가 나서면 채희가 더 생활하기 불편해질 것 같아서.”

 

잡혀사는구나.”

 

민훈이 피식 웃었다. 로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요. 이 마음 자체가 미안한 상황이 됐지만.”

 

경호팀을 붙이자 로진은 한 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채희의 입장에서는 따라오는 이상한 사람들이 더 늘었다. 그녀는 길을 걸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검은 옷의 사람들 때문에 주변에도 눈에 띄었다. 이젠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려고 해도 만원돈은 들 것같다. 채희는 한숨을 쉬고 나서 갈 길을 계속 갔다.

 

거리의 티비에는 제훈의 모습이 비쳤다. 최근 제훈은 포털사이트 메인기사에도 나오고 팬들도 제법 생겨서 팬클럽의 인원이 천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채희는 가장 가까웠던 제훈의 그런 모습이 실감나지 않았다.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얼떨떨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아파트를 찾아갔는데 제훈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돈이 좀 벌릴 테니 호강시켜주겠다는 말에 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인기와 돈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달만에 점점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었다.

 

커피숍에 도착해서 채희는 곧장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꿈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 자신은 당장 오늘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릇을 씻는 것부터 하고 있는데 고참이 채희를 툭툭 쳤다.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라는 말인 줄 알고 황급히 가서 주문을 받는데, 한참 동안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다. 채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인물이다.

 

화경이 새침하게 입을 내밀며 서있었다. 채희는 얼떨떨하게 화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덴, 당장이라도 망하게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마.”

 

네가 나한테 명령할 입장이야?”

 

얘기할 시간 없어. 얘기하려면 나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해.”

 

당장 시간 내.”

 

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화경은 발끈한 듯하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제 마치는데?”

 

“7.”

 

꼼짝말고 여기 있어.”

 

그러고는 나갔다. 채희는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 같았다. 억누르는 버릇이 또 나왔다. 자신의 감정인데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 걸까.

 

금새 마치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랬지만 시간은 흐른다. 교대를 하고 나니 어느새 화경은 커피숍 탁자에 앉아있었다.

 

나가자.”

 

화경이 먼저 휙 나가자 채희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밖에는 차가 한 대 서있었다.

 

네 차 안 타.”

 

채희가 꾸역꾸역 말했다. 저번에 갇혔던 기억이 났다.

 

걱정 마. 커피숍 갈 거니까. 그리고 네 호위기사들이 잔뜩 있는데 데려가봤자지.”

 

호위기사?”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검은 옷들이 전부 미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화경의 말을 듣자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또 일어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비꼬는 말이 적잖이 안도가 되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었구나.

 

그래도 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경은 채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채희는 화경에게 딸려갔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새에 차 안에 타고 만다. 화경은 문을 닫았다. 채희는 다시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차는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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