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남자 29
“잘 봤다. 그런데 선배는 왜 제훈이랑 같이 사는 거예요?”
“너랑 결혼하려고.”
“이젠 별 감흥도 없네요……. 그 말이.”
“감흥 없어도,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걸.”
제훈을 찾아가자 그는 이미 화경과 무언가를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넌 여기있어봐.”
로진이 구석에 채희를 두고 앞으로 걸어가 무어라 말을 하더니 곧 채희 쪽으로 되돌아왔다.
“제훈이는 2차 가나봐. 우리끼리 밥먹자.”
제훈이 늦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어서 채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경이와 제훈이가 친하다는 것은 뜻밖이었지만 그 뿐이다. 채희는 안 좋은 생각은 떠오르기 전에 억눌러버리는 버릇이 있다. 가끔씩은 그게 터져서 혼자서 방 안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렇지 않을 것같다.
“치킨이라도 사갈까?”
“아파트로 가시게요?”
“밖에서 먹어도 되지만.”
“음, 아니에요.”
채희는 자신의 입에서 왜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로진은 원래 그렇듯 안색의 미동이 없었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집에서 살게 되니까 좋네. 너도 초대할 수도 있고.”
로진은 채희에게 자신의 마음이 흑심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서는 흑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심 없이 밝고 안정된 톤이었다. 그게 어쩐지 채희에게는 섭섭했다. 공연장과 아파트는 붙어있었다. 둘은 상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제훈이와 사는 건 어때요? 그 애, 손 많이 가는데.”
채희가 묻는다.
“그 녀석이랑 사는 것은 별로지만 그래도 너랑 더 친해진 것같고 너한테도 더 나을 테니까. 그럼, 저기 치킨 사가자.”
“저는 순살이요.”
그 순간, 로진이 멈칫했다.
“난 뼈있는 것만 먹는데…….”
둘의 눈빛이 불안하게 마주쳤다. 채희가 입을 떼려는 순간 황급히 로진이 말을 가로막았다.
“순살 먹자! 반반?”
“네!”
가게는 주문이 바쁜 것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제 막 6시가 되었다. 아주머니는 주문을 받자마자 닭을 튀기기 시작했다.
“선배는 부자라면서 치킨도 먹어요?”
“돈이 좀 있다고 해서 다를 건 없어. 비슷하게 먹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사람이지. 다만…… 좀 더 오랫동안, 좀 더 편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발전하려고 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도태되기 쉬우니까.”
로진의 새하얀 이마가 담백해보였다. 치킨의 기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다. 채희는 그 모습을 보다가 턱을 괴었다. 잘생긴 얼굴이기도 했지만 눈매와 입가가 단정해서 자꾸 봐도 질리지 않는 인상인 것 같다.
“부럽다.”
“응? 뭐가?”
“나도 선배처럼 잘 생겼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충분해. 여기서 더 잘생기고 예쁘면…… 내가 곤란해.”
이미 제훈이 채희가 좋다고 난리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싫고 제훈이 더 좋다고 해도 그 것은 채희의 선택이다. 가슴이 아프고 쓰려도 존중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점점 더 늘려나가는 것은 사절이다. 제훈이 그러는 것도 자신의 관대함을 최대치로 발휘해서 참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제훈도 없고, 좋은 날이었다. 채희가 집에 놀러오는 것이 제훈과 함께 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였지만 중고등학교 소년 때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렇게 설레는 것은.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빛은 흐리게 흩뿌리다가 이내 점점 잦아들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어슴푸레해진 길목에서 로진은 나란히 걸었다. 채희는 일부러 약간 뒤처져서 로진에게 익숙한 길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걸음은 자연적 느려지고 있었다.
아파트단지 안에 들어서는 동안 기계음이라던지, 이런저런 소음이 있었지만 아파트 안에서 거실 탁자 위에 치킨을 올려놓자 자연스럽게 침묵이 찾아왔다.
“텔레비전이라도 킬까요?”
채희가 그 침묵에 조금 당황해서 말을 빨리 하자 로진은 싱긋 웃었다.
“난 이대로 좋은데.”
“그, 그럼 그렇게 해요. 맥주 드실 거예요?”
“응.”
둘은 치킨포장을 열지 않고 잔부터 부딪혔다.
“나중에 맛있는 술 사줄게. 맥주 좋아해?”
“주종을 가리지 않아요.”
채희의 당당한 말에 로진이 푸, 웃었다. 로진은 어느샌가 엷게 웃고 있었다.
“오늘도 난 시간 괜찮은데. 갈래?”
“오늘은 됐어요. 치킨도 샀고.”
“제훈이가 없으니 좋네. 하지만 그 녀석과 같이 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실 수도 없었겠지?”
채희는 픽 웃었다.
“아뇨-. 자주 보게 된 건 사실이지만.”
로진의 몸이 채희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아직 닿기까지는 멀다. 로진은 과감하게 몸을 기울였다. 그제야 채희 가까이에 얼굴이 갔다. 채희는 움찔하더니 정면만 쳐다보았다. 입김이 귓가에 닿는다.
“그 때, 정말 내가 잘못했는데.”
“아니에요.”
“또 잘못하게 될 것같아서.”
“아.”
“미안.”
입술이 가볍게 뺨에 닿고 떨어진다. 로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몹쓸 놈이지?”
“아뇨. 제가 더…….”
“미안해.”
“그럼 저도 미리 사과할게요.”
“응?”
“미안해요.”
채희는 얼굴을 들이밀고 박치기를 하듯이 로진의 입술에 꽁 박고는 떨어졌다. 로진은 놀라 눈을 감지도 못했다. 채희는 상기된 얼굴로 다시 돌아와 맥주잔을 들었다.
“자, 미안해할 필요 없죠? 건배!”
“무슨 뜻이야?”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뜻.”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괜찮아?”
“……적당한 선에서는요.”
로진으로서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로진은 상기되어 채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지는 않았다. 의사를 알 수 없는데 자신의 욕망으로 안고보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술이 술같지 않았다.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취하지 않으려고 마시는 것과 다름없었다. 마실수록 애써 정신이 말짱해졌다.
“갈게요.”
“데려다줄게…….”
“많이 마셨어요. 저번에도 데려다드렸는데 선배랑 술마시면 안되겠다.”
로진이 혼자 계속 마시는 통에 채희는 알아서 두 잔을 먹고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로진은 몸을 가누기 힘들어보였지만 비틀비틀 일어섰다.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어디로?”
“침실로!”
채희는 로진을 부축해 침실로 데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로진이 채희를 안더니 침대에 파묻혀 손으로 그녀를 가두어버렸다. 채희가 애써 빠져나가려하자 이번에는 다리로도 가둔다. 덩치가 있으니 무게가 있어 도저히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채희는 멍해졌다. 침실로 부축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채희를 꽉 껴안고 있었다.
“괜찮아. 보내줄거야.”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로진은 채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훈은 화경과 소윤을 포함해 새로 만든 기획실의 사장과 술을 마셨다. 화경을 제외한 각자가 불편한 자리였다. 사장은 제훈에게 스타성이 있다고 말했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라서 티비에 얼굴만 자주 비춘다면 팬들이 저절로 늘어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소개를 해주시지 않았더라도 류제훈은 합격을 했을 거라는 둥, 그런 실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제훈은 생긋 웃으며 자신이 성공에 조급한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급함을 보이면 수싸움에서 질 뿐이었다.
그는 새벽까지 달리려고 했지만 화경이며 소윤이 빨리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제훈도 자연적 빨리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아파트 비밀번호를 눌렀다.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치킨이 놓인 것이 보였다. 정리되어있었지만 이걸 식탁에 두지 않고 거실에 두었다는 것이 거슬렸다.
“아, 왜 사서 먹고 안 치워뒀어!”
큰소리를 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안은 조용하다. 제훈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로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혼자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그의 몸통 위에 채희의 목도리가 놓여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목도리의 끄트머리를 꼭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