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남자 27
“옆 아파트를 비워놨어. 그 애는 언제든지 옆집에서 살아도 되는데. 그 편이 안전하기도 할테고. 본인이 싫다고 하니 문제야.”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계시니까.”
“그나저나 넌 요즘 여자도 안 만나는군? 집에 계속 있으면서 기타를 치니까 시끄럽기도 하고. 안 나가도 곤란하군.”
“남이사. 생각이 많아져서 죽겠으니까 건드리지 마.”
“채희에게 진지해지면 내가 곤란한데.”
“늘 진지했다. 모르면 꺼져. 내가 화경이 계획은 더 잘 알 수도 있어.”
“계획은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진행상황은 내가 빨리 파악할 수 있지. 일단은 힘을 합치자. 집이 들켰으면 네게 어떤 말이 떨어졌을 거 아니야?”
화경과는 어제도 만났었다. 제훈은 떨어뜨리기 전까지 높게 날아오를 수 있게 하라고 화경을 설득시켰지만 그 말을 하고서도 화경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 때 보인 것이 소윤이었다.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그녀에게 또 한 번 다가가야하는가. 스스로 망설였지만 제훈은 결국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경이 지금 하려는 짓을 알아야겠다고. 그걸 알면 그녀에게 정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고.
소윤은 그 말을 듣고 화경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소식은 전해져오지 않았고 화경은 제훈에게 오디션을 제안했다.
“딱히. 나보고 오디션을 보라고 하던데.”
“왜?”
“거래를 제안했거든. 나를 스타로 만들어 달라고.”
그 때 제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제훈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미친.”
“왜?”
“채희가 오가는 루트가 들어갔어.”
“생명에 위협이 가는 일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고.”
“무슨 일이야?”
로진이 벌떡 일어섰다. 제훈은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마 채희가 와보면 알 거야. 무사히 올 것같긴 하거든.”
그 때 벨이 울렸다. 뭔가 화면으로 보이는 채희의 상태가 이상했다. 올라올 때까지 로진은 초조하게 제자리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오다가 물벼락을 맞아서……에취!”
올라온 채희는 물을 맞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옷이 너무 큰 옷밖에 없는데.”
제훈이 후드티를 뒤졌다.
“채희야. 옆 아파트 비워놨는데 와서 살지 않을래? 네가 이런 꼴 당하는 걸 보고만 있다니, 내가 정말 미안하다. 정말이지.”
“선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운이 엄청 나빴을 뿐……. 에취!”
“내가 성공하기 전까지 생명의 위협은 없을 거야.”
이젠 채희가 듣던, 아니던 계획에 대해 말하는 제훈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당하면 정신적인 문제도 적지 않을 거다!”
“쟤 봐! 내가 몇 년간이나 봐왔지만 쟤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기 쉽지 않다? 저 단단한 신경줄을 봐!”
“채희야. 이 것도 내 생각엔 화경이가 한 것같은데 이 쪽으로 이사오는 게 어때?”
“화경이요?”
채희는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라면 뭐 그냥저냥 버틸만 해요. 휴학한 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신경 안 쓸래요. 걔도 참 오죽하네.”
모처럼 채희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운동을 해야겠어.”
채희는 제훈이 건넨 수건을 받아들고 젖은 머리를 털었다.
“사실 오다가 깍두기 아저씨도 세 명이나 만났다구. 우연이 아니란 말이지?”
“야. 너 폭력배들하고 싸우는 건 아니겠지?”
제훈이 걱정스럽게 채희를 보았다.
“조폭은 내가 조치를…….”
로진이 앞으로 나서자, 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엔 캔커피 사드리면서 대화했어요. 조폭보다는 사설탐정인 것같은데 고생이 많으신 것같더라구요. 저한테 운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해서 같이 운동하기로 했어요.”
“그 분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로진이 말하자, 채희도 선뜻 번호를 건네 주었다.
한 달 후. 제훈은 객석이 가득차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평소에 무대체질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가는 길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성공이 다가올수록 채희의 안전은 위협받았고 그렇다고 맥을 놓고 가만히 있으면 화경은 당장 눈치를 챌 것이다. 로진은 그 번호가 다행히 조직폭력배들의 번호가 아니라 보디가드 선에서 끝났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 이상 조직 폭력배를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것이 적잖이 안심이 되는 듯 화경을 믿는 듯했다. 화경과 제훈을 오가는 추락의 협약을 알지 못하면 그럴 법도 했다. 제훈으로서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한낮은 자외선이 따가웠다. 제훈이 작은 종이로 햇빛을 가리며 걷는데, 차에 기대어 선 여자가 제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윤이었다.
“어, 웬 일이에요?”
“응원하러 왔어. 화경이가 잘 지원해준다며?”
“네.”
“걔한테 배반당하거든 나한테 와. 걔가 그렇게 의리가 넘치는 타입은 아니거든.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렇지만.”
“화경이가 잔인해질 때면 저도 정이 떨어지곤 하죠. 그런데 착각하시는 게, 그 애와 저는 사귀진 않아요.”
“그냥 서포트만 받는 거니?”
제훈은 으쓱했다. 소윤이 생각하는대로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제훈은 저 쪽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흰 원피스가 있었다. 화경도 찾아온 모양이다.
“……가볼게요.”
“그래. 화경이도 왔더라.”
“누나, 저 잊어버리세요. 맞아요. 저 누나 이용한 거.”
제훈은 소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되려 소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이렇게…….”
소윤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왜 이렇게 날 비참하게 하니.”
“미안해요.”
소윤의 눈가에 엷게 눈물이 고였다. 제훈은 그 모습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화경이 앞에 있었다. 제훈은 화경에게로 걸어갔다. 화경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훈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렸다.
“소윤이와도 거래하니?”
“누나인데 존칭을 써줘.”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화경과 입씨름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훈은 화제를 돌렸다.
“왜 왔어?”
“로진선배가 온대서.”
“뭐? 걔가 왜 와!”
“어쭈, 너는 로진선배한테 존칭 안써? 로진선배는 널 보러 오는가보던데, 둘이 아는 사이야?”
제훈은 이 오디션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재벌집들이 다 모이는 오디션이라니 어마어마하다. 심사위원들도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잘해. 내정은 해놨지만 너무 못하면 떨어뜨릴 수밖에 없지.”
화경은 피식 웃었다. 네까짓게 합격이나 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보여서 제훈은 오기가 생겼다. 기필코 되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