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남자 24
로진을 돌려보내고 제훈은 줄곧 잤다. 수업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시쯤 되어 느직하게 일어나보니 소윤누나의 전화가 5통이 와있었다. 그리고 로진의 문자도 와있었다. 아파트주소였다.
“망할 놈.”
제훈은 중얼거린다. 제훈은 오늘도 느꼈다. 채희의 안전은 채희에게도 로진에게도 맡겨놓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자신은 자신의 방식대로 그녀를 지켜나갈 생각이었다.
둘 다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기업을 운영하겠다는 로진이라는 놈이 그렇게 순진한 데에 대해서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아 소윤누나. 오늘 모임 있어요? 저도 누나 친구들 보고 싶죠. 이제 남친이잖아요. 소개시켜주세요. 제가 누나친구들한테도 잘 해야죠. 누나 친구들이잖아요. 아 전화는 잔다고 못 받았어요. 어제 작곡한다고 좀 피곤하더라구요. 일할 때는 연락 안 받는 거 알잖아요. 아아 술먹고도 작곡하죠. 그 때 더 잘 되요. 그럼요.”
6시에 약속을 잡아놓고 제훈은 끊었다. 모임에 누가 나올 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화경이 나오기를 바랬다. 그 여자도 소윤의 친구인 것은 분명했으니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제훈은 컴퓨터를 켰다. 오늘은 공강이다. 6시까지는 작곡을 하고 잘 생각이었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다가는 로진 같은 놈을 결코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다른 것은 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재산은 유일하게 기가 죽는 면이었다. 그만큼 많이 벌지는 않더라도 생활 정도는 넉넉하게 꾸리고 싶었다.
“에이! 젠장!”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더더욱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음표를 되는 대로 찍어내고는 제훈은 일어섰다. 성질이 나자 금새 마음이 바뀌었다.
6시가 되기 전에 나가서 쇼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제훈아, 나가니?”
채희의 어머니가 제훈이 내려오자 말을 건넸다.
“네. 참 아주머니, 천천히 말하려고 했는데 저 이사하게 될 것 같아요.”
“이사? 왜? 계속 같이 살았는데 갑작스럽기도 하고 섭섭하네.”
“가도 계속 찾아올게요. 준비는 아직 좀 해야되는데 미리 말씀은 드려놔야할 것 같아서!
동네는 멀지 않아요. 모레쯤 이삿짐센터 부를 거예요.“
“가끔 얼굴 비춰줘. 서운해서 어쩌니.”
“물론이죠!”
제훈은 싱긋 웃고 나서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쇼핑보다 로진이 사놨다는 아파트에 가서 집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제훈은 휴대폰을 뒤적였다. 어느새 로진이 보낸 문자는 저 뒤로 밀려있었다.
주소는 익숙한 동네여서 제훈은 쉽게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도로변에 세워진 커다란 단지여서 이 근처에서 그 아파트를 모르기가 더 어려워보였다. 채희와 자신이 살던 빌라와는 제법 이질적인 느낌이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각지대가 없도록 보안이 잘 되어 있었다. 로진이 채희를 데리고 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와보니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영 모자란 놈은 아니었군.”
제훈은 혼잣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106동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차가 사다리를 놓고 서 있었다. 이사를 하는 것을 보자 어쩐지 로진의 짐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파트 위로 올라가자 그 느낌이 맞았다. 로진이 문 앞에서 기대 서 있었다. 큰 키와 날렵한 몸이 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제법 멋있어서 제훈은 짜증이 났다.
“어이.”
“왔냐?”
느닷없이 마주친 것인데도 로진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언제 입주하면 되냐? 주소만 적어놓고.”
“언제든. 그리고 너도 우리 아버지를 좀 만나줘야겠다.”
“내가 왜!”
“나도 독립해야하고, 그러려면 나를 감시할 감시자가 필요하거든.”
“계약하고 많이 다른 거 알지?”
“한 번 뿐이야. 그리고 관리비도 일체 없을 거고. 여러모로 편할 거다. 네 입장에서는.”
“전혀. 네버. 자유스럽던 내 공간에서 자유가 없어졌어.”
“짐도 없이 여긴 웬 일이냐?”
“집 한 번 보려고 왔다! 집 보는 것도 일일이 눈치 봐야 하는 거냐? 나도 계약조건 다시 생각해봐야겠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맘대로 봐.”
집은 꽤 넓었다. 음악활동을 하려면 방 배정을 잘 해야겠지만 첫 눈에는 구조가 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친구들 데려오는 것도 가능하냐?”
“서로 매너는 지키자.”
“아니, 이게 뭐냐고!”
“독립을 원한 것 아닌가? 동거인이 있어도 되냐고 미리 물어봤었고.”
“그게 너라면 거절했을 거다!”
“그럼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망할. 알겠다고. 나는 어쨌든 나와서 살아야하니까. 알겠어.”
“짐은 내일부터라도 가져오면 된다. 언제 오든 상관하지는 않으마. 다만,”
“다만?”
“그래도 채희와 네가 옆집에 산다니까 조금은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하루 뿐이었지만.”
“안심되냐? 하! 됐어. 너랑 말해봤자 나만 손해지. 하여튼 난 가야겠다. 오래 있어도 네가 있는 한 힘들기만 할 거고.”
“학교가냐?”
“아니! 약속있다.”
“여자들하고?”
“상관마라.”
“잘 놀다 와라. 이렇게 놀아서야, 채희를 맡겨도 안심되지는 않겠군. 굳이 채희 옆에서 살라고 하지는 않겠다.”
“닥쳐!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집구경하러 안 왔어. 으, 속 편한 소리를 해대는군. 너야말로 포기하는 게 어때?”
“내가 지금 포기하면 둘에게 모두 최악일 뿐이야.”
“둘?”
“채희. 그리고 화경이.”
“흥, 너도 두 여자 사이에 끼여서 뭐하는 거냐? 그리고 화경이? 그 앤 가해자일 뿐이야!”
로진은 말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했다. 제훈은 그런 로진을 밀치고 엘리베이터버튼을 눌렀다. 로진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때까지 말이 없었다. 제훈을 내려보내고 나서 로진은 작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제훈은 발길가는 대로 아이쇼핑을 하다가 날이 조금 저물기 시작할 때쯤 모임장소로 갔다. 소윤이 뛸 듯이 기뻐하며 제훈의 손을 잡았다. 제훈은 싱긋 웃으며 손을 빼었다가 다시 소윤의 손등을 잡았다. 소윤은 빙그레 웃었다.
“내 남자친구야!”
소윤이 말할 때, 제훈은 유심히 소윤의 친구들을 살폈다. 그 중에 혹시 화경이 있을까 싶었다. 화경과는 같은 과도 아니라서,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화경이는 못 왔어.”
“요즘도 그 선배한테 빠져있나봐?”
“뭐 그렇지. 그리고 요즘 바쁘잖아. 사냥준비하러 다니느라.”
제훈은 두런두런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대화들에 대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신경을 곤두세울수록 표정은 부드럽고 화려하게. 눈빛도 선량하게. 끊임없이 얼굴근육을 체크하고 있었다. 사냥준비? 웃기고들 있네. 비웃음이 선량한 웃음으로 바뀌어서 나오게끔 그는 연습한 매력을 뿜어냈다.
커다란 홀에서는 열댓명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앉기도 하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제훈은 그 홀에서 과하지 않게 웃음을 흩뿌리며 다녔다. 그녀들에게 술을 섞어주고 웃으며 노래와 춤도 선보였다. 넓은 공간이어서 활동하기 좋았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그녀들은 금새 제훈을 마음에 들어했다.
“너 노래 잘한다.”
“앞으로 성공하겠어. 연예인 지망생이랬지? 아니야? 아아, 가수 지망생? 그게 그거지. 뭐!”
소윤은 불안한지 여러사람이 제훈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제훈의 팔짱을 꼭 꼈다.
“밖에 나갈까요?”
“그래!”
제훈의 말에 소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밖에 나가자 어느새 어둠이 거리에 짙게 깔려있었다. 제훈은 소윤의 차 앞에 서서 화경의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