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남자 23
“채희야. 학교 다시 다닐 생각 없어?”
로진이 물었다. 아무래도 채희가 학교를 다니는 쪽이 패턴을 알기도 쉽고 보호하기도 좀 더 쉬울 것같았다.
“이미 절차가 끝나서 끝난 일이에요.”
채희의 말은 깔끔했다.
“알바를 하려고요.”
“무슨 알바?”
“집의 일도 돕고, 다양한 단기알바를 하고 싶어요. 영화 엑스트라라던지, 그런 거?”
“음. 내가 알바시키면 할래?”
로진이 물었다.
“단기면요.”
밝고 천진한 말투였지만 채희의 말엔 당해낼 수 없었다. 단기면 의미가 없었다. 화경의 앙심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한 변덕으로 금방 끝날 수도 있었지만 오래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당장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단기라도 후하게 쳐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줘요.”
채희는 웃었다.
“채희야.”
“왜요?”
“달리기 잘 하지?”
“그럼요. 중딩 때는 전국체전에도 나갔으니까요.”
잘 도망치겠지? 로진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나저나 둘이 진짜 뭐예요?”
“뭐가?”
채희의 질문에 제훈과 로진이 동시에 대답했다.
“티격태격거리면서 맨날 붙어다니네. 저번에는 제훈이 방에……읍.”
“닥쳐. 닥쳐. 제발.”
채희가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제훈이 뒤에서 채희의 입을 손으로 막은 탓이다.
“방에?”
로진이 뚱하게 물었다.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같았다. 제훈이라는 녀석은 뒤에서 좋은 일을 할만한 녀석은 아니다.
“아니에요.”
채희는 간신히 제훈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선배도 기왕 오셨으니 아침 드시고 가시죠.”
“아냐. 사실 전달할 게 있어서 왔는데.”
“뭔데요?”
“아냐.”
채희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훈이랑 얘기할게.”
“뭐? 난 이제 잘거야. 이제 스토커짓 만족할만큼 했으면 꺼져줄래?”
“흠. 뭔데요? 제훈이한테 말할 수 있는데 저한테는 말 못하는 건가요?”
“채희는 화경이란 아이, 알고 있니?”
로진은 결국 그 이름을 꺼내고 말았다.
“동아리에서 보기는 봤어요. 말은 한 번도 못해봤지만요. 예쁘던데요.”
“음. 걔가 한 일인 것같아.”
“뭐를요?”
“네 사물함 테러.”
“걔가요? 아.”
의외로 채희의 반응이 담담했다. 로진으로서는 화경이 돈이 많고 조직폭력배와 알고등등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불안감만 키울 뿐 대처방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조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불안한 것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고보니 화경이가 로진선배를 좋아하는 것은 유명하죠.”
“알고 있니?”
“선배만 모른 거예요. 그건.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짓은 심했지만. 화경이라면 더한 일은 하지 않겠죠.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하네요! 누가 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채희는 오히려 속이 풀렸다는 표정이다. 설마하니 아는 사람이 더한 일을 하겠냐 싶었다.
“둘이 그런 이야기 했구나. 말해줘서 고마워요. 제 일인데 나만 모르면 꼭 바보가 된 기분이잖아요.”
“복수심은 안 들어?”
“별로? 이미 해결된 일이니까요.”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애가 더 너를 괴롭힐 수 있다면?”
“음…… 설마요!”
그 말을 듣다 못한 제훈이 채희에게 외쳤다.
“너 바보냐? 그런 일이 있으면 화내고 미워하는 게 정상이야. 바보야!”
“욱해서 그랬겠지. 사람이 욱하면 이상해지잖아. 평소에 영 이상해보이는 애는 아니었는데. 뭐.”
“음…….”
로진은 깊은 숨소리를 냈다. 어쨌든 안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낙관주의였다. 자신이 너무 안전에 민감한 것일까. 그런 태연함을 보자 그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불안감이 조금 내려앉았다.
채희를 볼 때면 항상 불안함이 내려앉고 편안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어쩌면 첫 눈에 자신에게 그런 안정감을 줄 사람이라고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야 처음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로진은 꽂힌 것을 그대로 믿는 편이었다. 화경이 해꼬지를 할 것이라는 점도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같았다. 채희와 있으면 다소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복학할 때까지는 더 알아볼게.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알바자리도 알아볼게.”
“너무 신경쓰지는 마세요. 그리고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로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채희는 그 모습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 날은 없었던 일로 할게요. 선배도 잊어버리세요.”
“멀어져야 되는 건가?”
“꼭 그러지는 않아도 되요.”
“옆에 있어도 되는 거지?”
“네. 친구로 해요.”
채희의 눈빛은 올곧았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다. 로진은 깊게 상심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채희가 말하는 그 날은 아마도 놀이터에서 입을 마주쳤던 날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땐.”
“그 땐 좀 놀랐었어요. 그 뿐이에요.”
“그래. 미안했다.”
“아침 먹고 가세요.”
“아니야. 내가 또 너무 흥분해서 달려온 것 같아. 돌아갈게.”
로진은 돌아섰다. 제훈도 하품을 하며 돌아섰다.
“다시는 오지마. 스토커.”
그리고 제훈은 문을 닫았다. 채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진은 그 모습을 보고 엷게 웃고는 다시 돌아섰다.
마음 한 구석이 저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