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 서툰 남자14
텐트 안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는데 사람은 한 동안 오지 않았다. 채희는 혼자 안을 서성이다가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팔도 욱씬거린다.
밖에 나가자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채희가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이면 그들은 채희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말을 걸 틈이 없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멀찍이 서서 과활동이며 동아리행사며 모두 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반쯤 꽂아넣고 껄렁하게 서서 채희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채희는 30여 분만에 드디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류제훈이었다. 제훈은 채희가 자신을 보자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뒤돌아섰다.
자신도 남들처럼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류제훈!”
그러나 채희가 소리치며 부르는 것에는 방도가 없었다.
제훈은 커다란 나무 밑에서 다리를 꼬아 선 채로 휴, 한숨을 쉬며 오만하게 채희를 바라보았다.
“누나가 따뜻한 커피 한 잔 쏜다.”
“자판기 커피 가지고 생색은.”
“우리 동아리 바자회 하는데 살만한 거 많을 거야. 이번에 의외로 명품도 막 싸게 나오더라니까. 나도 들어서 안 거지만 나는 명품에 관심 없어도 너는 패셔니스타잖아. 살만한 거 많을 거야.”
“그 얘기 언제 들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 잡다한 애들 얘기를 언제 들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오늘과 어제는 아닌 게 확실한데.”
“뭐야? 무슨 소리야. 비꼬려면 제대로 비꽈.”
“비꼬는 줄은 아는구나?”
“잘은 모르겠는데 왠지 기분이 나쁘네.”
채희는 생긋 웃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아이들이 너를 피하는 것같지 않았어?”
제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채희는 놀랐다. 제훈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김아정이 먼저 밥을 먹으러 갔기에 혼자 먹는 것보다는 여럿이 먹는 것이 나을 것같아서 과아이들이 학식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같이 먹자며 찾아갔는데 아직 밥이 많이 남아있는데도 다들 배가 부르고 잘 먹었다며 일어서버렸다.
뿐만 아니라 동아리 안에서나 과 안에서 자신이 나타나자 바글바글하게 서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다 자신을 향했고 심지어는 모세의 기적처럼 양 갈래로 갈라지기도 했다. 채희와 접촉하지 않으려는 듯이.
마치 전염병환자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지만 채희는 애써 기분 탓이라고 다독였다. 자신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묻어두었다.
그러나 제훈의 말을 듣자 그 모든 것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제훈아.”
“왜?”
“나, 뭐 크게 잘못한 거 있어?”
“있지.”
제훈은 비웃듯이 입가를 틀어올렸다.
“뭔데?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친구니까 좀 말해줘. 알아야 고치지.”
“재벌집 따님 비위 상하게 한 게 아주 크게 잘못했지. 괘씸죄라고 들어봤어? 너?”
“무슨 소리야 재벌집 딸이라니?”
“너 소문 쫙 났어. 로진하고 사귄다고. 그걸 들은 재벌집 따님이 화났고.”
채희는 멍해졌다.
“어떻게 할거야?”
제훈이 다그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나랑 사귀는 척이라도 해. 방법은 그 것 뿐이야.”
“로진선배는?”
“너랑 안 사귀면 관계 없잖아. 애초에 그 놈 때문에 피해입은 거고.”
“싫어.”
“뭐?”
“너랑 계약연애 안할래.”
“그럼 진짜연애를 하던가.”
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제훈을 보았다. 제훈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그 수밖에 없다니까.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아.”
“좋아. 내가 백번 양보할게. 그렇다면 로진 최대한 피해서 다녀. 봐도 못 본 척하고 무시하라구. 확실하게.”
“싫어.”
“와.”
제훈은 가슴 깊숙이 나오는 한숨을 토했다.
“미쳤어? 너?”
“아니. 내가 왜 피해 다녀야 하는데? 뭘 잘못했는데?”
“진짜 사귀냐?”
“아니.”
“그럼 잔말말고 도망치라구! 그 마수에서.”
“만날 거야.”
“야!”
“로진선배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왜 피해야돼? 그 재벌집 따님이 뭔데?”
“와, 너 고집 센 건 알았지만.”
제훈은 자신의 가슴을 퍽 쳤다.
“야.”
“왜?”
“오늘 로진 데리고 학교 정문 앞에 작은 강당에 와.”
“왜?”
“왜냐고? 곡 발표할 거야. 학교 허락 맡았어. 난 소강당에서 공연할 거고 네 시로 곡 쓴 것도 거기서 발표할 거니까 알아서 찾아와.”
“알았어.”
채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로진 꼭 데리고 와.”
“싸우기라도 할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데리고 와. 너가 나한테 미안한 마음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놈 꼭 데리고 와.”
제훈은 벌떡 일어서서 나무 뒤로 뚜벅뚜벅 걸어서 채희로부터 멀어졌다.
채희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삐죽였다.
내가 너한테 미안한 게 뭐가 있는데?
“왜들 사람이 없지? 다 도망간 거야?”
채희가 제훈과 헤어져 안으로 들어가자 회장선배가 책상에 앉아 로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책상은 딱 하나. 텐트 안에 있는 것도 위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더 들어온 물건도 없었다. 자신이 제훈과 밖에 나간 이후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 티가 났다.
“어어, 채희 너밖에 없다. 일하러 왔구나.”
로진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채희도 둘을 향해 목례로 인사하고는 말을 걸었다.
“오늘은 사람이 많이 없네요.”
자신이 오기 전만 해도 꽤 왔다갔다한 것같은데 착각일까.
“축제 첫날이라 그렇지.”
민훈은 씨익 웃었다,
“사람이 없는데 죄송스럽지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로진선배, 저녁에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로진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괜찮겠지만 오늘은 사람이 너무 없어. 나라도 천막을 지켜야할 것 같은데.”
“아냐, 천막 지키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오늘은 바자회 물건도 많이 없어. 다녀와. 다녀와.”
민훈이 손은 내저어 로진을 쫓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