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 서툰 남자3
“아닙니다.”
로진의 시선이 간 자리는 한 시간 전, 채희가 잠시 서있었던 장소였다. 로진은 턱을 괴고 빙긋 웃었다.
“너 간만에 웃는다.”
“아닙니다.”
로진은 다시 얼굴을 굳히고 서류를 정리했다.
“야, 널 기다리고 있어.”
회장은 자신도 서류를 정리해서 로진에게 건넸다. 그리고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네?”
“네 팬클럽 회장.”
긴 머리의 청순한 여자가 문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로진은 무표정 그대로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부럽구만. 무표정의 사나이!”
그는 로진의 어깨를 툭 치고 동아리방을 나갔다. 나가기 전 그는 동아리 방에 얼굴만 빼꼼히 내민다.
“동아리방에서 19금은 안돼~”
“회장!”
“어머, 민훈선배도~!”
그 말에 환하게 웃는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화경이었다. 로진과 민훈과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아리 활동을 활발히 하는 편이었고 이리저리 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화경이구나.”
로진은 단조롭게 말했다.
“더 반갑게 말하라구요. 오빠는 정말 캐릭터 분명하다니까! 그래서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같아요. 매력있어.”
화경은 활짝 웃으며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로진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화경이를 비롯하여 화경이를 중심으로 모이는 친구 몇몇들밖에 없었다. 팬클럽은 거의 화경이가 강제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도 나가자.”
로진은 어느새 짐을 다 챙겼는지, 탁 소리를 내며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동아리방을 빠져나와 건물의 바깥은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하늘이 맑았다. 도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지어진 R대는 별과 구름과 달이 모두 보이고 있었다. 로진과 화경은 하늘을 보았다. 로진은 달을 보고 있었고 화경은 별을 보고 있었다.
“오빠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화경은 로진에게 바짝 붙어왔다. 춥다는 것은 좋은 핑계거리였다. 팔짱을 끼고 바짝 붙은 화경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다고.”
“정말?”
“응.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화경은 줄곧 로진을 따라다녔다. 그녀가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지 로진으로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이 고맙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해요?”
“그,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로진은 쩔쩔맸다.
“너무하네.”
“너는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어째서요?”
“나같은 사람을 나쁘다고 하는 거야. 나와 있으면 상처만 입게 될 거야.”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데.”
“기다리지 마.”
로진은 학교 밖에 나올 무렵이 되자 화경과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회장님은 잘 지내시죠?”
화경은 일부러 로진의 시선을 따라갔다.
“물론이지. 너희 아버지도 잘 지내시지?”
로진은 그제야 시선을 조금 자유롭게 돌릴 수 있었는데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학교에서 일찍 빠져나갔던 채희가 보였던 것이다. 후드티를 쓰고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로진은 화경을 밀어냈다. 화경은 거의 매달리다시피해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로진의 몸부림에 가까운 동작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화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로진을 보았다.
“미안해.”
로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채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잠깐만요!”
그 찰나에도 화경은 로진을 잡아당겼다.
“급한 일이 있어서. 정말 미안해.”
“로진선배!”
로진은 다시 시선을 옮겼지만 채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질 통로라면 단 한 군데. 그는 그 쪽으로 마냥 달려갔다. 채희는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로진은 황급히 두리번거렸다. 골목 안에서 갑자기 채희가 다시 나타나는 듯하자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후드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등학교 때 육상부 선수였어.”
마치 채희와 커플티마냥 후드를 뒤집어 쓴 여자였다. 로진은 깜짝 놀라 그 쪽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선아선배였다. 회장인 민훈선배와 사귄 지 2, 3년 쯤 되었을까.
“선배였어요? 진짜 안 궁금합니다.”
자신의 착각이었을까. 로진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로진을 선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바라보았다.
“나는 운동 싫어하고 채희가 육상부 선수였다구.”
번쩍, 로진의 고개가 들렸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무슨.”
“이렇게 여자들 후리기 있기? 없기?”
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땡잡았네! 땡잡았어!”
“뭐가 말입니까?”
째려보다시피 하는 로진의 눈빛에 선아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평소에 비싸서 먹기를 꺼렸던 소곱창을 로진에게 사내라고 했더니, 로진은 순순히 선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선아는 로진이 제법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진은 그다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 중 그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아는 흥얼거리며 소곱창을 뒤집는 시늉을 했다. 로진이 뒤집으라는 말이었다. 로진은 입술을 깨물고 곱창을 열심히 뒤집었다.
“둘이서 먹는데 삼인분이나 시킵니까?”
로진은 곱창을 구우면서도 투덜거렸다.
“난 많이 먹어.”
“살찝니다.”
“채희도 많이 먹어.”
“…….”
“오올, 말을 못하는데.”
“둘 다 살이 안찌는 체질인가 봅니다.”
“오올 지금 아부하는 거야?”
깔깔깔, 선아는 배를 잡으며 웃었다. 로진은 선아를 노려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선배는 형수님 되실 분이니까 아부입니다. 그리고 채희는 정말 그런 것같더군요.”
“쓰읍, 야, 걔 속에 살 많아. 옷으로 가려서 그렇지 살이 아주.”
로진은 참지 못하고 선아를 노려보았다.
“속살을 봐요? 질투는 추합니다.”
“목욕탕 같이 가는 사이야. 너야말로 질투는 추해~. 내가 지금 채희 속살 봤다고 그러는 거지. 지금.”
“아닙니다!”
“소곱창 탄다. 타.”
선아는 한 쪽 팔을 옆에 있는 의자에 기대며 사뭇 여유로운 포즈를 하고 있었다. 로진은 한 쪽 입꼬리가 씰룩였다. 머리에는 진땀이 나고 있었다.
“진짜야? 너 그렇게 말한 거?”
“뭐가요?”
“결혼하쟀다며.”
“네.”
선아는 순순히 인정하는 로진을 보며 살짝 입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