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 극본7
며칠이 지나서 서윤을 만났다. 만나자고 한 것은 나였다. 서윤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미소와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웃어보였지만 긴장이 묻어있으리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표정을 숨기는 걸 잘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아니, 그냥.”
느닷없이 추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나는 얼마간 농담따먹기와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흘리듯 물었다.
“열쇠, 왜 준 거야?”
“말했잖아. 가끔 죽지 않았나 확인하러 와달라고.”
“그게 전부야?”
“한 사람한테는 열쇠를 맡기고 싶었고. 혹시 내가 열쇠를 잃어버릴 지도 모르잖아.”
“또?”
“또? 으음, 별로 이윤 없는데. 갑자기 왜?”
“그냥. 이상하잖아. 아무리 친구라도 보통 열쇠를 주진 않아.”
“꼭 보통에 맞추어 살 필요는 없지.”
“그 말은, 너하고 안 어울리는데.”
서윤은 픽 웃고는 대답했다.
“나보단 너하고 어울리는 말이긴 하지. 너한테 배웠어.”
“요즘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내 말에 서윤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서윤의 말투는 빠른 듯하면서도 언제나 여유가 묻어있다. 그 여유가 진짜 여유인지, 가짜 여유인지 그 것은 모른다. 그리고 모두, 그런 것을 의심하며 피곤하게 살지도, 사람에 대해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나도, 가짜 태도니, 진짜 태도니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만약 맞다면, 말해주었으면.
“그나저나, 신기하더라. 나는 일기를 안 쓰거든. 꽤 오래 전부터 일기를 쓴 거 같던데.”
“신기할 것까지야. 안 쓰는 사람도 많지만 쓰는 사람도 많아.”
“왜 그 전화번호, 거기에 끼워둔 거야?”
“실수였어. 빠뜨리고 간 거 자체가 실수잖아. 요즘 실수투성이라 걱정이 많아. 왜, 일기 본 게 껄끄러워?”
“그야 그렇지. 남의 일기니까.”
“넌 안 그런 듯, 순진해서 걱정이야. 옛날 거잖아. 그 때 생각이 어떻든, 지금은 바뀌었고.”
일기건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말해준다해도 내가 믿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어머니하고는 그 후로 연락했어?”
“응. 기본적으로 사이는 좋으니까.”
나는 물음을 접었다. 더 이상 깊이 들어가도, 서윤은 막이 있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침범할 수 없었다.
“요즘 영 맥이 빠져있네. 너.”
승철의 인사에는 승철식의 걱정이 있었다. 사실 지금 나는 맥이 빠져있었다. 어디에도 표현하지 못할, 그리고 표현해서도 안되는 우울은 그 통로가 없어 점점 깊어가는 것이었다. 승철과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자라왔던 산을 오른다. 오르는 인원은 여러명 있었지만 하루 년수가 다르게 줄어갔다. 그래도 늘 서너명은 모였지만 저번 달과 이번 달은 한창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할 때여서 승철과 나, 둘 밖에 없었다. 조만간 이 모임도 해체될 듯했다. 하긴 이 산은 아름답거나, 가파르거나 아주 높지도 않으면서 올라가는데에 2, 3시간은 걸려서 등산을 하는 데에 별로 매력이 없었다. 그렇게 봉우리에 가도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성취감을 느끼기엔 힘든 산이었다. 여기서 자라와서 포근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 뿐이다.
“겉으로도 그렇게 보여?”
“응. 매우.”
산을 오르며, 나는 정신이 피로해서인지 얼마 가지도 않고 지친다는 기분을 받았다. 이렇게 정상까지 오르고 집에 가면 뻗을 것만 같다.
“복잡한 친구가 있어. 근데 같이 있으면 같이 복잡해져. 어떻게 생각해?”
“같이 안 있으면 되지.”
“같이 안 있으면 친구가 될 수 없잖아.”
“걘 왜 복잡해?
“글쎄? 사정이 복잡해서 그렇겠지만 연극-을 한다는 기분, 이지. 상황극을 한다던지.”
“재밌는 친군데, 왜? 야, 넌 너무 고지식하게 살지마. 앞에서 연극 좀 하면 어떠냐. 같이 즐기면 되지.”
“……그런 노골적인 연극 아니거든요.”
“그럼?”
“생각나는 말이 없어. 약간 가식같은 거? 좀, 뭐지.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는? 생각이 안난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나쁜 건 아닌데 친구같지 않고 부담스럽다고 말해야할까.”
“친구 안하면 되지. 별걸 걱정한다.”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그러지 말라고 그래.”
“근데 그게 확실하지가 않아.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는 건 맞는데, 그게 정말 연극인지.”
“나 참. 그거가지고 뭐라 그러면 네가 나쁘다. 친구한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는 인간도 있는 거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왜 가식이라고 그래.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욕하면 진짜 나빠.”
“끙.”
“말해봐. 안 그랬으면 좋겠다던가, 부담스럽다던가.”
“역시 그래야겠지.”
“늘 좋은 모습만 보인다고?”
“응. 뭐, 대부분 그렇지. 연극은 다른 의미지만, 화도 안내고 잘 웃어.”
“신기하네.”
“속은 깊어. 어둡고, 뭐 가정환경 때문이겠지.”
“흠.”
“늘 웃고 있어서, 가식이라기보다는- 그냥 인형같아.”
“무슨 피에로냐. 당하는 상황에서 웃고 있게. 그런 녀석들이 제일 위험해. 사정은 모르겠지만 네 태도가 답답하네. 관계를 끊어. 그러지 말고.”
“왜?”
“그런 애들은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거든.”
“아까 전 말하고 좀 다른 거 같은데.”
“왜 있잖아. 공포영화에도 그런 게 꼭 괴기스럽게 나오지. 살인범도 잘 생긴 경우 꽤 있어.인간이 솔직한 면이 있어야 인간적인 거야. 그림그린 얼굴은 괴기스러운 거야. 음.”
너 서윤이 좋아하잖냐. 나는 말하고 싶었지만 하늘을 보며 계속 걸었다. 숨이 가쁘다. 정상으로 갈수록 힘이 들어 말 수가 줄어들었다. 어느덧 정상이 코 앞이었다. 등산객들이 많지 않은 산이었지만 정상으로 갈수록 등산객이 드문드문 보였다. 다른 길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꼭짓점에서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다들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옷차림만으로는 산책을 나온 모습처럼 보이리라 싶었다. 늘 입던 잠바라 주머니 안에 열쇠가 만지작거려졌다. 서윤의 집열쇠였다.
열쇠를 생각하자 다시 착잡해졌다. 모든 시작은 열쇠였다. 이 연극의 시작도 아마 열쇠를 받아든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생각을 되풀이하면 할수록 착잡했다. 서윤은 아마도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명료했다. 이 것은 관객이 나 하나뿐인 연극이었다. 나만의 연극을 펼쳐준 건, 어쩌면 서윤 나름대로의 최고의 호의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은 더 복잡했다. 서윤을 나쁜 인간으로 몰아치고 싶었던 처음의 마음이, 속은 더 편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산을 보았다. 그 때 서윤이 떨어졌던 곳은 이 길과 다른 방향의 길이다. 그 때 가파른 곳으로 떨어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표정과도 같은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없이 무서웠을지도. 하지만 습관은 입을 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일기가 최근에 내게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렇게 보이고 싶다’라는 그녀 의사가 진실이라면 ‘이용하려는 의도없이 착하게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만으로도 서윤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야.’
틀림없이, 이상하고, 비틀어진 표현방식. 소통이 없는 보여주기. 무엇을, 위해서.
“정상이다!”
승철이 뿌듯해하며 기지개를 폈지만, 나는 여전히 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며 가쁜 숨을 쌕쌕 쉬었다. 오늘은 등산을 하지 않을걸, 그랬다.
“화연이도 같이 왔으면 좋을텐데. 오늘 학원가서.”
승철이 말했다.
“서윤이는 산에 안 오려나.”
“걔가 산 타게 생겼냐. 왠지 분위기가 고급이라.”
“산타는 게 고급이랑 안 고급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같이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던 거 까먹었어?”
“아, 그랬지. 근데 왠지 서윤인 좋은 추억이 없었던 거 같은데. 안 오고 싶어하는 거 같았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까탈스런 애야.”
힘들었겠지. 그 것을 착용하기까지. 그 가면을 만들려면 작은 노력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뒤늦게 기지개를 폈다.
“응? 왜- 그래도 성격 좋잖아. 얼굴에 딱 ‘착함’이라고 써붙여놨는데.”
“그래. ‘착함’이라고 써붙여놨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써붙이는 것밖에 말을 못하는 녀석이지. 말로 자신의 어두움을 털어놓으면 어떻게든 왜곡되어 데미지가 돌아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아이.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기식으로 이룬 자신의 규칙을 결코 깨지 않아서- 내게도 이 열쇠를 준걸까. 나는 멍했다. 아직 열쇠는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내 설레발일 수도, 있었다. 직감은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하기에는 심증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