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 극본3
나는 멍하니 입구 쪽을 보았다. 서윤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화연이 너무 적대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화연을 불렀다. 그녀가 흘끗 이 쪽을 보자, 나는 귓속말을 했다.
“1시간 쯤 있다가, 승철이랑 같이 가. 승철이한테 부탁할 게 있으니까 같이……가서…….”
“그래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았다. 화연은 생각보다, 그녀의 존재에 더 곤두서 있었다. 화연은 그제야 누그러진 얼굴로 털썩, 의자에 기대었다. 술집의 의자는 적당히 쿠션이 있었고, 그 쿠션이 있는 만큼 가격도 적당히 하는 곳이었다. 화연과 승철이 미리 시킨 안주가 나오고, 술이 한 배 돌 때까지 서윤은 오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는 묘하게 겹쳐들리는 서윤의 소리에 문께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휴대폰을 들고 막 들어온 서윤이 거기에 서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고전적인 속담을 생각하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서윤은 곧 이 곳을 보며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닫고 승철과 화연을 보았다. 승철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화연은 뚱한 표정이었다. 화연은 서윤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승철이 서윤을 옹호할수록 역효과가 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니나 다를까, 승철은 벌떡 일어서 서윤을 맞이했고 나도 안 쪽으로 몸을 옮겨 자리를 비켰다.
“왔구나. 하도 안와서 안오는 줄 알았어.”
내가 웃으며 말하자, 서윤도 또 그 때와 같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화연은 혼자 술을 들이켰다. 나는 어수선하게 사람을 맞이하는 승철과 화연의 모습을 대충 스쳐보다가 서윤에게 말했다.
“이 쪽은 승철, 이 쪽은 화연, 나는 유. 알지?”
서윤은 웃는다. 나는 서윤이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막연히 짐작한다. 10년이 넘게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타인과 타인같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변했느냐고 물어봤자, 어리석은 질문이다. 변하는 게 당연한만큼 긴 세월이었고 그 동안 서로에게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신중하지 않으면 다치기 쉬웠다. 더욱이 화연과 같은 눈빛과 함께라면 예민한 기류가 뒤따라온다. 나는 화연의 날이 조금만 누그러지기를 바랬다.
“다들, 많이 변했네. 몰라보겠어.”
“많이 변했지-. 너는 안 변한 것 같다. 별로.”
서윤의 말에 승철이 대답했다.
“사람이 많이는 안 왔어. 다들 바쁜가봐.”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못 오는 게 아니라 안 오는 거겠지.”
내가 중얼거리자, 화연이 썩 내키지 않는 듯 이죽거렸다. 평소에도 직선적인 성격이었지만 불쾌함을 가리지 않고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불쾌를 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향하는 것처럼 꾸미는 수완에, 우리는 우리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처럼 싸우고 화해하기엔 속마음을 감추기에 너무 능숙해져버렸다. 싸움을 하기엔, 계기없는 맹목적 감정이겠지만 예전부터 화연은 서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극단적으로 달랐고 그 성격의 중점 -어쩌면 서윤 쪽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쯤에 내가 있었다. 승철은 화연의 기운을 알아채고도 일부러 그러는지 서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서윤이가 오다니! 너는 정말, 얼굴을 안 비치더라.”
“미안해. 정말 오랜만이다.”
이내 또 웃으며 서윤은 말한다.
“간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애들 수가 적으니 아쉬운걸.”
“이제 단체로 만나기엔 너무 나이 들었지. 그 곳에 살았던 모든 애들을 어떻게 다 모으겠어? 이렇게 조촐하게 모이니까 난 좋은데.”
내가 말했다.
“야, 지환이 형이랑 다들 섭섭해하잖아. 그렇게 말하면.”
이 전에 우리는 한 아파트에 살았다. 한 아파트에 살았던 인연- 그건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도저히 인연이라고 할 수 없는 옅은 만남이다. 한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친해지지도 않거니와 혹여나 면식을 튼다해도 보통은 10여 년이 지나서 굳이 만나고자 할 이유가 없는 깊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 것은 상식에 속하는 상황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대부분 타인과 타인이다.
“아무튼 동갑내기 4인들만 딱 모였네. 옛날에…….”
화연이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화연은 말을 하다 말고 이 쪽을 보았다.
“비오는 날에 산에 올라갔었지.”
“아? 하하, 그 때 고생했었어. 특히 화연이, 너.”
승철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윤도 희미하게 웃는다. 나도 그 때 일이 기억이 나서 픽 웃었다. 그 아파트에서 살았던 우리를 묶어내는 것은 앞에 펼쳐진 거대한 산이었다. 아파트를 나서면 바로 등산로가 있는 그런 곳에서 우리는 도시 아이들답지 않게 산을 뛰어 놀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 산딸기가 많이 나는 곳이라던가 산의 지리에 관해서 우리는 은밀하게 속삭이고 정보와 물건을 교환하곤 했다. 등산로가 있다곤 하지만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이 자연스레 길이 된 산으로, 인조물은 전혀 없었다.
비오는 날, 산에 올랐던 것은, 내게 있어서는 약간의 죄의식도 묻어있는 기억이었다. 넷이서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정상까지로 가기로 하고서 떠난 길이라, 우리는 망설였다. 다들 내려가자고 했지만 올라가자고 한 것은 나였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라 별 상황파악도 되지 않았던 우리는 무작정 산을 올랐다.
바닥이 미끄러웠고,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가팔랐다. 결국 서윤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어렸던 나에겐 낭떠러지로 보였다. 지금 봐도 조금 겁먹을 정도일 것이다-에 떨어진 것은 아직도 생각하면 아찔했다. 간신히 팔을 붙들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내 다시 미끄러져, 나무가지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가, 요행히 비때문에 내려가던 등산객들의 도움을 받아 구출될 수 있었다. 그 때, 누구보다 통곡하며 어쩔 줄 몰랐던 사람이 화연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화연을 달래야했다. 서윤도 화연을 달래며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주장해야했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조금은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아니…….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나는 고개를 기울여 화연을 보았다. 화연은 서윤을 보고 울다가 울음을 그쳤다. 변색된 기억이라 떠올리기 힘들지만, 아마도 그랬다. ……그건 안도가 아니라 공포. 미묘하지만 감정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공포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리고 지금 서윤을 보는 시선도, 이질과 혐오와는 달랐다. 사실, 나도 그 때…… 서윤을 보았을 때 강렬한 기억이 있다. 울지 않거나, 의연한데서도 놀랐지만 그 뿐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아프다는 소리를 할 법한데, 그녀는 어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괜찮아.’라고 말했다. 아직도 그 표정은 기억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강렬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인형이 아닐까 싶어서.
“그 때, 어찌나 우는지.”
승철이 화연을 놀렸다.
“쳇, 그 일은 유 때문이야. 비오는데 괜히 가자고 우겨서.”
“미안해. 그 땐 어렸잖아.”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말했어.”
화연은 갑자기 말을 끊으며 술을 마셨다. 화연은 힐끗 서윤을 본다. 나는 화연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성격은 아니다. 아까 전의 적의에 비해서, 조용하기도 했다. 어쩌면, 화연은 서윤에게 겁먹은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화연은 언제나, 서윤을 꺼리면서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서윤을 본다. 그리고 역시 저 웃음이 싫다고, 생각한다. 연습을 통해서 생긴 것 같은 웃음. 예전부터 예의바르던 저 웃음이 더욱 견고해져서 다가오면 우리도 한 발짝을 물러서서 예의를 지켜야만 했다. 모든 사람에게 존중을 요하는 듯한, 저 존중적인 태도는 서윤이기 때문에 더욱 위압적이었다. 누구도, 서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서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란 힘들테고, 저 견고함은 가까이 있으면 문득 피부 속의 생살에 데어 우리는 움찔하거나 통증을 느끼고는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너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로 좋은 사람이지만. 그 ‘너무’때문에.
“아무튼 잘못했어. 그 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유는 고집불통이지, 뭐.”
승철이 웃으며 내 머리를 위에서 툭툭 두드렸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 그걸 툭 쳐내고 창 밖을 보았다.
“근데- 나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얄 것 같은데.”
화연이 내 얼굴을 보며 말한다. 마음을 가감없이 내어보이는 저 표정은, 몹시 지루하다는 듯,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셋이서 모이면, 언제나 최소 서너시간쯤은 놀던 때와는 사뭇 다른 안색이었다. 시계를 보자, 어느덧 서윤이 온지도 한 시간이 되어있었다.
“가려고?”
승철이 화연의 옆에서 툭 묻는다. 벌써 가냐는 투였다. 화연은 함께 갈 마음이 없다는 듯한 승철의 어투에 골이 난 듯, 승철을 보았다. 승철도, 화연도 아까 전부터 서로의 태도에 대해서 껄끄러운 모양이다. 살갑지 않은 기류가 둘 사이에 흐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엠피쓰리를 꺼내 승철에게 건넸다.
“뭐야?”
승철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