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붉은 립스틱
붉은 립스틱
강복주
붉은 립스틱, 짧은 치마, 망사스타킹. 그녀는 그야말로 TPO를 탈피했다. 수많은 18세 소녀, 소년들이 머물러 있는 학교. 수많은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녀를 포착하면 둘 중 하나였다. 외면하거나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그 주인공인 그녀는 시선을 즐긴다기에는 뚱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 이완.”
이완이라는 학생도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교실 책상에 큼지막한 신문을 올려놓고 밑줄을 쳐가며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을 보자, 여자의 망사가 보였다. 이완은 얼굴을 찌푸렸다.
“옷 좀 입어라.”
“잘 입은 건데?”
“나 생각해봤는데.”
“……그래서.”
“콜!”
“그래. 일단 책상에서는 내려가라.”
“오늘부터 1일! 딴 놈이 볼까봐 두려운가봐?”
이완은 입을 꾹 다물고 여자를 노려봤다. 그제야 그녀는 내려왔다. 아무도 들리지 않게 완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계약연애야. 지도연.”
“후후.”
지도연이 떠나가자 반친구들이 이완에게 몰려들었다. 그 중에 이완의 단짝이었던 이수국은 완의 어깨를 잡고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쟤 곧 퇴학이야.”
그러나 그의 말림은 대다수의 떠들썩한 부럽다에 묻혀버렸다.
이완은 눈을 감았다. 괜한 선택이었을까. 미친 짓을 해버린 걸까. 소문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텐데.
이완은 같은 반의 새봄을 바라보았다. 새봄은 여기를 쳐다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완은 뚜벅뚜벅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새봄은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문 들었어?”
“너무 시끄러워서 직접 봤는데, 축하해.”
“다른 할 말은 없어?”
“없어.”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문제집에 펜을 갖다대었다. 그러나 한 줄도 더 적지 못하고 막혀 있었다. 새봄은 다시 이완을 올려보았다.
“가줄래?”
“……응.”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것은 친구인 수국이다. 수국은 이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였다고 미친 짓하는 중?”
“응. 그런가.”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새봄에게 차인 것은. 물론 수국과 이완만이 아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열. 어쨌든 사귀긴 사귀었네. 우리학교 최고 꼴통과 사귀시는 느낌은 어때?”
“거절이 거절로 안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
“거절이지.”
“더 다가와 달라고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게 헷갈려.”
“그럼 더 다가갈 것이지, 꼴통이랑 왜 사귀어, 등신아. 한 번 해보려고?”
왜 그랬을까. 이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새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냥한 것이 질투가 났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새봄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무언가 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내어 보이고 싶다. 이완은 자신의 마음이 삐거덕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마음에 한 번의 거절이 또 들이닥친다. 그래도 조금 더 지나면 또 한 번의 거절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멀쩡해지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마음과 같이 하늘도 울적했다. 먹구름이 울먹울먹하다가 끝내 가는가 했더니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종이 울렸다. 세상은 어두웠고 이완은 우산을 들고 아이들 사이를 걸었다. 눈에 띄는 아이가 있다. 새봄이다. 우산을 잊었는지 먹구름을 보고 있었다. 초조하게 손가락이 까닥거린다.
이완은 말없이 우산을 내밀었다. 새봄이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동안 서로가 서로를 읽어내려 시선이 엉켰다. 이완의 시선이 먼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타다닥.
이완의 시선이 잠시 엇나간 사이 새봄은 뛰었다. 비는 새봄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고 몸에 스며들었다. 이완은 멀거니 새봄을 보았다. 새봄은 멀어지고 있다.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 섞여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완의 팔에 세게 부닥치는 팔이 있었다.
“선생님한테 혼나다 이제 왔다?”
애교섞인 말투였다. 전교생의 시선이 여기로 내리꽂히는 듯하다. 이완은 흘끗 옆을 보았지만 다시 시선이 저 멀리에서 흔들린다. 도연은 이완의 턱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이완의 고개가 강제적으로 도연에게 향했다.
“헤이, 내가 왔다구. 지도연.”
“그래.”
이완의 고개는 다시금 도연을 피한다.
“커피 마시러 갈래? 비도 오는데.”
“집에 갈래.”
“그럼 나도 너희 집에 가도 돼?”
“뭐?”
“흠, 겉으로만 연애하는 거니까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야할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맛있는 건 없어도 돼.”
도연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이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합의사항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다. 도연이 합의에 다다르기 위해 이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완은 좀 더 경직되었다. 도연은 정말로 자신의 집에 가기 위해 발을 옮긴 것이다.
“카페가자.”
“콜.”
도연은 촐랑촐랑 앞서서 걸었다. 누가 봐도 튀는 차림새. 이완은 그런 게 참 무디게 느껴졌다.
카페에 가기 전, 도연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다. 신문이라고는 전혀 가까이 할 것같지 않은 도연이었기에 이완은 의외였지만, 곧 자신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구석에 곧 자리를 잡고, 이완이 미간을 찌푸린 모습을 과장되게 흉내 내며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완은 그냥 놔두었다. 그러나 곧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새봄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맞고 걸어갈 것을 걱정했는데 우산을 씌워준 사람이 있었다. 한 학년 선배였던가, 종종 봤던 얼굴이다.
이완은 마음이 시렸다.
‘놔두자.’
그렇게 생각하고 시킨 라떼를 후루룩 들이켰다.
“해장국 먹어? 후루룩 후루룩 먹네.”
뭐가 그리 웃긴지 도연은 깔깔 웃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봄과 그 선배다. 이완은 바로 긴장을 해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조금 흘린 모양이다. 도연이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안녕. 이완.”
“안녕. 새봄아.”
“여긴?”
선배가 물었다.
“같은 반 친구예요.”
새봄이 대답했다.
“저는 여자친구고요.”
새봄이 씩씩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완은 홀로 남겨진 듯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선배라는 사람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새봄이랑 친해 보였는데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새봄에게 고백한 것은 새봄과 이완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완이 발설한 수국 정도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봄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비밀은 지켜지고 있는 것같았다. 이완은 벌떡 일어섰다.
“저희 나가보겠습니다.”
“어? 어.”
당황하는 틈에 이완은 나와버렸다. 도연은 당황하다가 신문도 커피도 놔두고 이완의 걸음에 따라붙었다. 도연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좀 천천히 걸을 수 없어?”
“알았어.”
이완은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천천히 걸었다. 도연이 물었다.
“너네 집 가는 길?”
“네 집 가라.”
“내일 콘서트 티켓 생겼는데, 보러 갈래?”
“알았으니까 오늘은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좋았어! 가는 거다.”
도연은 팔짝 뛰다가 주저앉았다. 힐이 아픈 것같다. 이완은 손을 내밀었다. 도연은 베시시 웃었다. 일으켜 세운 후, 이완은 가만히 서 있었다. 도연은 가라는 무언의 압박에 웃으며 사라졌다. 절뚝거리며 자신의 집으로 가는 도연을 보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이상하게 마음에 찝찝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현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외면했다. 또 누구와 무슨 비교를 하려고.
“아들, 이상한 소문이 있어?”
“뭘.”
“누구랑 만나고 다녀?”
“나 알아서 해.”
“너, 이리 나와.”
이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문을 닫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엄마의 목소리가 뒤이어 꽂혔다.
“좋아. 저녁시간 때 얘기하자.”
그 말이 더 불편했다.
저녁 시간에는 나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이런저런 하루의 점검을 하기 때문에 불편했지만 안 나가면 완전히 안 해버린 게 된다. 대체로 경제공부를 시키는 편, 이라고 생각한다. 이완도 돈이 없으면 죽고 만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다.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고 점검받는 것을 내심 즐기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불길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역시 부엌으로 가니 식구들의 표정이 심상찮다.
“이완아.”
“네.”
“성인 되고 나서 시작했으면 했는데 주식 한 번 시작해봐라.”
“네.”
“그리고 여자 함부로 만나는 거 아니다.”
“…….”
“노는 애하고 사귄다고 말이 많더라. 얼른 정리해라.”
“안 그래도 정리하려고 했어요. 정리할게요.”
“앞으로 여자친구는 금지다. 네가 잘 나가면 다 따라붙을 텐데, 왜 그래? 고작 그거 하나 못 참아?”
“…….”
이완은 불만을 눌러 삼킬 수 있었지만, 살갑게 말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대답 안 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이구, 속터져.”
엄마도 옆에서 탕탕 가슴을 쳤지만 이완은 그냥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완은 대충 먹고 나서 바로 양치를 하고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한 손으로 뒤적였다. 연락이 오는 곳도 없었다. SNS도 하지 않았고 때로 단톡에 규정적인 말이 뜨는 것이 전부였다. 그 중 하나는 사진 동아리였다. 어떤 카메라를 샀고 찍었고가 매번 올라왔지만 이완은 거의 유령회원이었다. 사실은 새봄이 카메라를 샀기 때문에 함께 들어간 동아리였는데, 장점은 선배들의 잔소리나 기합이 거의 없었다. 참석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심지어 선배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 흔하지 않은 동아리였는데 이완에게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새봄은 선배들과 함께 잘 어울려 다녔으니까.
그런데,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왜 보질 못했지? 이완은 황급히 문자를 보았다. 새봄으로부터 와있는 문자였다.
-내일 우리 동기끼리 출사하려고 하는데 너도 갈래?
-응
무심코 보내고 나서야 도연이 생각났다. 이완은 찝찝했다. 그래도 계약연애니까 반드시 가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괜찮을 거야.
이완은 우선순위를 새봄으로 잡기로 했다.
다음 날, 다행히 도연은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완에게는 좋은 점이기도 했지만 역시 잘 안 맞는다고 느껴지는 점이기도 했다.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왜 안 나타나는 것일까. 찾아다니기는 귀찮다. 이완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문자 하나는 보내두기로 했다.
-오늘 못 감.
답장은 없었다. 방과 후에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갈 데까지. 정신 없이 풍경을 바라보며 구도를 잡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끝없이 위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폰을 꺼내든 이완은 화들짝 놀랐다. 문자가 300여 개. 전화도 울리고 있었다. 이완은 전화를 꺼내들었다.
“너 어디야?”
“못 간다고 말하려 했는데…….”
“됐고, 당장 와.”
“…….”
“계속 기다릴 거니까 빨리 오라고. 당장 와. 끊어.”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이완은 식은땀이 났다.
“이완아, 여기 봐.”
새봄이었다. 어느 새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좀 웃어.”
이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급한 일 있으면 가도 돼.”
“없어. 급한 일.”
이완은 여유로운 척 허세를 부리며 카메라를 집었다.
“너도 찍어줄게. 너는 모델답다.”
“모델은 무슨.”
새봄은 풋 웃었다. 이완은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기억은 다시 지워진 채로 웃음이 있었다. 다행히 오해는 풀린 건지도 모르겠다. 이완은 이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도연에게는 내일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
석양이 축축한 땅 곳곳을 붉게 적셨다. 닿는 곳마다 마른 먼지가 일었다. 이완은 어깨를 펴고 석양을 바라보고 정면을 찍었다. 오늘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잠이 잘 올 것 같은 하루였다. 이완은 뒤돌아보았다. 그대로 새봄이 있었다.
“나 걔랑 헤어질 거야. 도연이.”
“아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좋은 선택이라고 봐.”
“너는 나를…….”
“아, 내가 통솔자라 애들 좀 모아올게. 마칠 시간 다 되어서.”
결국 새봄과는 별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약간 달뜬 마음은 학교 가는 길까지 유지 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는 수국이 어깨를 내리쳤다.
“인마, 어떻게 된 거야?”
“어?”
“도연이 울던데. 뭐 어디 갔는지 물어서 사실대로 말하긴 했지만.”
“……사과해야하나?”
그 때 이완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가 이완의 어깨를 잡았다. 이완은 무심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악력이 강해서 무겁고 아프다.
“이완이랬나? 잠깐 볼까?”
“수업 10분 전인데요?”
수국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이완은 그를 보았다. 그를 알았다. 야구부 3학년 장기철이다. 학교에서는 유명한 선수였다.
“갈 테니까 걘 놔주세요.”
“그래야지. 따라와.”
장기철은 이완을 앞장세웠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밀리는대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곧 체육관이 보였다. 체육관 안에는 네 다섯 명의 부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도연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자신이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이완이었다.
“왜 불렀어?”
“뻔뻔하네.”
“안 그래도 사과하려고…….”
“사과? 필요없어. 이완, 사람 마음 가지고 논 댓가가 뭘까?”
이완에게 보여줬던 그 애교로 이번에는 장기철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너도 놀림당하는 거지? 안 그래? 그래야 공평하지.”
“묶어.”
장기철이 말했다. 이완은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묶이는 데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벗겨.”
지도연이 말했다. 전의 그 미소로 키득키득 웃는다.
“너라면 비명 안 지를 줄 알았어.”
“사진 찍으려고?”
비명을 안 지른다기보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라 질려버린 게 아닐까. 이완은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완전히 겁에 질려 나온 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비명을 지를 준비는 되어있다. 소리가 들릴까?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물비린내가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는 쏟아붓고 있었을까. 이 비를 뚫고 목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안 찍어. 그런 짓을 왜 해?”
“영상을 찍는 건가?”
“상상력이 풍부하네. 노노. 단지, 앞으로 잊혀지지 않게 해줄게.”
지도연은 벗긴 상체 위로 립스틱을 꺼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이완이 몸을 뒤틀자, 바로 다시 부원들 손으로 고정된다.
“오빠 이름도 적어줄까? 깔깔.”
지도연이 장기철을 보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난 됐다.”
라고 말한다.
“살려주세요!”
그제야 이완은 크게 외쳤다. 바로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이완은 절망적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도 들린다. 꽤 여러 명이서 온 것같다. 수국의 신고일까?
“튀자!”
야구부원들과 지도연은 곧 사라졌다.
이완은 멍하니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새봄의 그림자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은 헐레벌떡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누가…….”
하며 몸을 살피다가 곧 알아냈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지도연이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이름이 적혀있네.”
이완은 앗차 싶었다. 그래, 아무 거나 써놨을 리가 없지. 몸에 씌여진 립스틱을 생각하자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문제아 녀석! 증거를 남겨놓자. 사진찍어 놓을까?”
“괜찮아요.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완은 힘없이 대답했다.
“이 녀석아! 증거가 있어야지!”
“됐어요.”
잊혀 지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잊어주리라. 결코 찍히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니 새봄을 보았다. 새봄은 사진기를 들더니 자신을 찍었다. 휴대폰 사진기가 아니라, 평소 들고 다니던 디지털카메라였다. 렌즈가 외계인의 눈처럼 커다랬다.
찰칵.
“왜?”
“증인은 있지만, 증거도 있어야 해.”
“새봄아. 혹시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싫어하니?”
평소에는 묻지도 않았던 말이 충격을 받자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싫지 않아.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새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절이었다. 아마도 잊혀지지 않을. 야구부원들을 뒤쫒아 간 동료들은 다행히 듣지 못했다.
이완은 천천히 밖으로 걸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소나기일까, 계속 올 비일까. 자신으로서는 그 것은 알 수 없었다.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자 어느덧 빗속이다. 립스틱은 지워지고 있었다. 바지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