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주 2025. 5. 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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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캠핑 

 




​1월 1일, 정확히는 12월 31일 저녁 10시. 단생각의 연말파티였다. 

솔리는 저번처럼 큰 파티장이면 어떡하지? 라고 걱정하며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입을 옷이 없었다. 무난한 게 최고다. 검은 티에 청바지를 입고 한편으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일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다르게 입을 옷도 없었다. 

그러나 단생각이 보낸 모임 장소를 봤을 때, 솔리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우린 역시 잘 맞아.'

라고. 주소는 캠핑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옷도 괜찮지 않을까. 

"데리러 갈까?" 
"그렇게 해주면 좋지만, 너무 힘들지 않겠어?"
"뭐가 힘들어. 데리러 갈게." 

사실 힘들지 않기는 했다. 5단계 완전 자율주행도 180년이나 되었으니까. 돈만 있으면 안 힘든데, 문제는 솔리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그래도 단생각은 차를 아껴놓는다고 타고 다니지를 않고 로봇택시를 이용했는데 차를 끌고 올 모양이었다. 어떤 차길래 그토록 아껴놓는 걸까? 부담스럽지 않을까? 솔리는 상상력이 뭉개뭉개 피어올랐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났다. 

조수석에 타자 단생각이 머리를 긁적였다. 

"왜 웃어?"
"티코 702네."
"오 차를 좀 아는 걸?"

자율주행으로 새롭게 나온 티코, 귀엽고 작은 소형차였다. 

"그걸 이렇게 아껴둔 거야?" 
"모르는 소리 마. 한정판이라고. 한정판."
"네. 네." 
"소규모 파티야. 10명 정도 될까? 새모이도 오고, 전여친도 오고. 아빠 친구분들 오시고. 그냥 가서 고기 구워 먹자." 
"응."
"옷차림이 됐네. 청바지에 티, 캠핑장엔 딱이지."
"장소를 너무 늦게 보내줬어."

솔리는 툴툴 거렸다. 

"뭘 입든 난 상관없어."

단생각은 눈치를 보았다. 차는 그 동안에도 계속 내달리고 있었다. 숲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 그리고 나뭇잎이 반사하는 달빛. 오늘은 보름달이어서 밤길이 밝았다. 단생각은 창문을 내렸다. 나무들이 내쉬는 공기와 우리가 내쉬는 공기가 소통하고 있었다. 

차단기가 티코를 막아섰다. 단생각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캠핑장 예약했는데요. 500번이요."
"들어가세요."
"사람 많이 왔어요?"
"이번 연말은 많지가 않네요."
"아뇨. 저희 일행이요."
"다 도착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단생각은 창문을 열고 천천히 진입했다. 솔리는 이건 어쩌면 상견례보다 더 부담되는 자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생각이 번쩍 들었다. 상견례는 두 분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데, 이건 열 명한테나 잘 보여야한다. 

"너는 고기만 먹고 가." 
"해 뜨는 거 보러 온 거 아니야?"
"부담스러울까봐."
"해 뜨는 거 봐야지!"
"그래. 어쨌든 딴 거에 집중하지 말고 먹는 거에 집중해." 

그렇다 하지만 들고 가야 할 짐도 있었다. 단생각 혼자 들기엔 무리였다. 

"놔둬. 내가 두 번 가면 돼."
"같이 들자. 같이 하면 한 번만 가면 되는데."
"넌 오늘 손님으로 온거야."
 
그렇게 투닥 거리고 있을 때였다. 두 남자가 저 멀리에서 걸어왔다. 전에 봤던 얼굴이긴 했는데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저렇게 몸이 좋은 사람이었나 싶었다. 얼굴도 오늘은 입술을 빨갛게 칠해서 뱀상이 부각되었다. 얼굴은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그 옆에 남자는 우락부락한 얼굴이었는데, 그래도 잘생겼다.

"새모이. 마침 잘 왔다. 이거 좀 도와줘."
"안 그래도 도와주려고 왔지. 오호?"

새모이라는 사람은 하얗고 우락부락한 남자보다 키가 조금 작았다. 그래도 슬림하고 큰 편이다. 그는 솔리를 보더니 작은 눈을 반짝였다. 

"안녕. 아기고양이."

'응?' 

솔리는 약간 얼어붙었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짐을 우락부락한 남자에게 넘기고 달랑 지퍼 백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세 남자는 걷기 시작했다. 솔리는 뒤를 쫒았다. 단생각이 제일 귀엽고 약한데, 단생각이 제일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구석자리에 강물이 잘 보이는 자리에 테이블과 화덕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파티는 시작 중이었다. 삼겹살과 꽃등심이 잘 구워져서 몇 접시나 가져갈 수 있도록 되어있었고 단생각이 가져온 것은 양념 된 갈비와 폭립이었다. 다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는데, 며칠 전에 봤던 그 여자도 술병을 사람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아가, 네가 아가구나." 

이해심은 솔리를 금방 알아보았다. 단생각 옆에서 쭈볏쭈볏하고 있는 솔리의 손을 덥썩 잡았다. 솔리도 어색했는데 알아봐 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덜 어색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솔리는 그렇게 말하고 성인이고 모두 평등한 20세가 되었지만 이건 너무 빠르고 낯설다고 생각했다. 아, 코가 꿰어버렸다. 

"내가 아가구나! 허허허. 앉아, 앉아. 앉아서 먹어."

20살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 시아버지인 단지는 20살의 몸이었지만 몸이 꿀단지처럼 통통했다. 그게 솔리의 눈에는 다 좋아보였다. 솔리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좋았다. 나무가 양 옆으로 그늘을 쳐주었지만 정면은 강물과 함께 탁 트여있었다. 동쪽이었고 강물의 폭은 넓어서 건너편이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은 달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달빛에서 빛나는 사람이 있었다. 솔리의 눈은 몇 분이나 멍하니 전여친을 쫓아다녔다. 

"술해요?"

달빛이 아름다운 밤, 모두가 20세였지만 새모이는 그 중에서도 외모가 빼어났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술이요?"

망설여졌다. 술은 아직 입에도 대본 적 없는데. 솔리는 술을 보다가 엄마가 겹쳤다. 

"아니요. 안 마셔요. 앞으로도 마실 생각 없구요." 
"단호하시네."

새모이는 픽 웃었다. 

"결혼은 왜 하려고 해요? 젊은데. 다 젊지만, 우린 구식의 20대이고, 당신은 신식의 20대이고. 모두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배워야할 게 더 많지 않아요?" 
"구식, 신식,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단생각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솔리는 경계심이 들었다. 이 사람은 왜 다 안다는 듯한 느낌을 풍길까. 

"새모이. 괴롭히지 마."

화덕에 고기 걸어두는 일을 마친 단생각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막았다. 
그러나 솔리는 처음 만난 날이 생각이 났다. 

그 날은 새로 나온 옥수수크림감자프라페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가자고 했고 57세의 솔리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공짜로 줄 수 없냐고 터무니 없는 질문을 직원에게 던졌다. 솔리는 엄마를 말렸고 직원도 난처해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사람도 있었고 솔리는 너무 쪽팔렸지만 죄송하다는 인사를 반복해서 하자 사태는 수습되었다. 엄마 나홀로는 그렇게 해서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없다며 성질을 냈지만 솔리는 눈물이 날 것같았다. 

엄마를 달래 거리를 걷는데, 뒤에서 직원이 달려왔다. 또 무슨 일일까. 솔리는 긴장했는데 직원이 옥수수크림감자프라페를 건넸다. 

"한 남자 분이 100만원 충전해놓고 가셨어요." 

너무 쪽팔려서 솔리는 더듬었다. 

"지금말고 다음에 먹어도 될까요?"
"네! 언제든 오세요."

배려 깊은 직원이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려는 찰나 솔리는 무슨 충동이었을까 직원에게 다시 뛰어갔다.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갚으려고요."
"가게 맨 오른쪽에 앉아계신 분인데요. 아직 계실지 모르겠어요."

솔리는 엄마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가게로 뛰어갔다. 
거기에 단생각이 작은 종이 팜플렛을 보며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앉아있었다. 

"저기요."
"네?"
"전화번호 뭐예요."
"전화?"
"아님 계좌번호 뭐예요."
"계좌?"

그는 환하고 귀엽게 웃었다. 

"100년은 사셨나보다. 그죠? 전화 소리 들으니까 구수하고 좋네. 아,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죠. 드시고 힘내서 좋은 일 하세요." 

단생각은 솔리를 100세는 된 20세로 알아보았다. 어떻게 57세를 20세로 알아볼 수 있는지 그 눈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그 정도로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가난해서 100세의 용어를 쓰고 있던 솔리는 일단 잘 지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편견도 없었고, 가난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솔리는 다시 새모이를 보았다. 하얀 얼굴, 빨간 미소, 약간 드러난 치아. 

"내가 먼저 단생각 꼬신 거니까, 이상한 소리,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신고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그런 생각도 그런 말도 한 적 없는데요. 찔리신 건가요?"
"결혼 선배로서 해주는 말이예요. 결혼 선배로서." 

단생각이 거들었다. 

"맞아. 나쁜 놈은 아니야. 저 녀석 이혼한 지 100년 됐거든." 
"이혼?"
"정확히 말하면 30년은 살았고. 이혼은 아니고 졸혼?" 

단생각의 말에 새모이는 픽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이번에 결혼하지." 

새모이는 아까 봤던 우락부락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름은 구설수. 저 사람이랑."
"남자랑?"
"응. 남자랑."

새모이는 쭉 앞으로 두 팔을 팔짱 껴서 괴고 나를 보았다. 

"이상할 것도 없잖아? 아기고양이."
 
​솔리는 위협감을 느꼈다. 무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단생각의 절친이 게이라니.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난 단생각을 지킬 거예요."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는지 새모이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내가 저 녀석한테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저한테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가족이니까요. 이제."

단생각이 접시를 10개는 옮겨놓다가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하필 새모이의 옆이었다. 

"우린 말이 잘 통해. 서로 싫어하는 것조차 잘 통해. 우리는 서로 이성적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것까지 잘 맞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솔리는 단생각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왜 내 옆이 아니라 새모이의 옆에 앉은 것일까. 

"매력제로."

새모이는 킥킥 웃었다. 단생각은 속도 없는지 픽 웃었다. 

"매력 있거든요! 매력 많거든요!" 
"그래요. 그래. 나한테 궁금한 건 없나?"
"전여친이라는 저 분, 어떤 분이예요?"

솔리는 기회를 덥썩 잡았다. 너무나 궁금했다. 

"나에 대한 건 없어요?"
"그래. 좀 그렇다."

그런데 두 남자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그러자 솔리는 뭔가 이 숨겨진 집안에 대해 더 미스테리함을 느꼈다. 뭔가 있는 것같았다. 

"단생각, 나한테 숨기는 거야?" 

새모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단생각을 보자, 단생각은 새모이를 보았다. 새모이는 빨간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다면야." 
"뭔데요?"
"내 전부인의 여동생." 
"네?"

완전히 뜻밖의 말이었다. 

"산행메이트야." 
"전부인은 남자고요?"
"전부인은 여자였어." 

이 사람, 정말 혼란하다. 

"그 당시로는 분위기가 그랬어. 계약결혼이었지."
"계약결혼?"
"참 잘 통했고 좋은 사람이었고, 그 것도 사랑이었을지도."
"자녀는요?"
"날카롭군. 딸이 한 명 있는데, 이제는 날 안 봐."
"아."
"날 싫어하거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새모이는 픽 웃었다. 

"왔다갔다하는군, 아기고양이. 어쨌든 단생각하고 있으면 고생 좀 할거야. 나도 그렇고 단생각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많거든. 이상하게 짜증 나는데 그렇게 돼." 

아까 짐을 지퍼 백 하나를 달랑 들고 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게 할 소리인가. 솔리는 불만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새모이 앞에서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이상한 위압감이 있었다. 

그 때 통통한 20대의 얼굴 단지가 이 쪽으로 걸어왔다. 

"우린 들어가 자야겠다. 아가, 너도 자려면 조금 자두렴."
"저는 괜찮아요! 들어가서 쉬셔요."

솔리는 방긋 웃었다.

"우리도 20대의 몸이긴한데, 옛날 습관이 있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좀 더 있다 들어갈게요." 
"그래. 텐트는 좋구나."

단지와 이해심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몇몇 사람들도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것은 단생각, 새모이, 전여친, 구설수 그리고 솔리. 

"사람도 몇 없는데 우리끼리 모여 앉자!"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새모이가 고함을 쳐서 두 명을 불러들였다. 솔리는 환영하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새모이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전여친은 술이 좀 올랐는지 발그레한 상태였고 구설수는 우락부락하고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였다. 

구설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단생각에게 손짓으로 쫓는 제스처를 했다. 단생각이 한 칸 옆으로 옮기자 그 자리에 앉았다.

전여친은 술에 좀 취했지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사정을 알게 되어도 미스테리하다. 솔리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단생각하고는 어떻게 만나게 됐어?"

새모이와 똑같은 질문. 

"단생각이 괴롭히지 말래."

새모이가 말했다. 

"단생각이 연애에는 정말 재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의 부드러움에 솔리는 나만 신경 쓰고 있었구나, 하는 뭔가 모를 지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홀짝이는 사람들. 그리고 소외감. 이렇게 술을 마셔도 잘 사는데. 그래도 겁이 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시작했고 솔리는 따뜻하고 은은한 보름달을 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들을 게 많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솔리가 모르는 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언제 쯤이 되었을까, 단생각이 솔리를 깨웠다. 

"해뜬다. 일어나자." 

눈을 뜨자 솔리의 주변에서는 어수선한 인기척이 많았다. 이미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솔리는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전여친은 술을 너무 마셔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구설수가 그녀를 챙기고 있었다. 

'내가 나설 것까지는 없겠지.' 

솔리는 동쪽을 보았다. 

벌겋게 달구어진 해가 뜨고 있었다. 

​오는 길에 단생각이 말했다. 
전부인과 딸에게서 모두 배척 받는 새모이는, 전여친을 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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